<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시인 최영미의 여섯 번째 시집이다.
문학계 Me too 운동의 중심에 서서, 용기 있는 목소리를 내 준 그녀.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된다. 각 부에서 몇 편씩을 기억해본다.
<제1부 꽃들이 먼저 알아>
밥을 지으며
목숨을 걸고 뭘 하진 않았어요.(왜 그래야 하지요?) 서른다섯이 지나 제 계산이 맞은 적은 한 번도 없답니다!
아무리 고군분투하며 내가 바라는 인생 스토리를 써 내려가려 해 봐도, 결론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얼마 전 슈가맨에 나왔던 양준일이 생각났다. 본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이라는 진행자의 질문에... "네 뜻대로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아. 하지만 걱정하지 마, 모든 것은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울컥했다.
인생의 쓴 맛을 적지 않게 본 그. 그에게 이루어진 완벽은 무엇일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그 완벽을 만드는 key 일까.
수건을 접으며
엉망인 세상을 내 손으로 정리할 순 없지만 수건을 내 맘대로 접을 수 있지. 수납장과 서람의 질서를 나는 사랑하지...... 세상과 맞선 투쟁의지를 불태우며 수건을 접는다......빨래 접기가 귀찮아지면 미련 없이 떠나야겠지...... 엉망진창인 세상을 정리할 순 없지만 쉼표와 마침표의 질서를 나는 사랑하지.
질서와 정의가 힘을 쓰지 못하는 세상. 부조리와 불균형이 판을 치는 세상. 그 속에서 단정하게 깔끔한 쉼표와 마침표를 찍으며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너무 맑은 날은 오히려 눈물이 났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 질서를 더 이상 챙기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삶의 가치조차 없는 것. 엉망진창 속에서도, 보잘것없지만 지켜야 할 쉼표와 마침표!
<제2부 지리멸렬한 고통>
괴물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거룩한 문학
그가 아무리 자유와 평등을 외쳐도 세상의 절반인 여성을 짓밟는다면 그의 자유는 공허한 말잔치.
..... 휴머니즘을 팔아먹는 문학은 이제 그만!
바위로 계란 깨기
계란으로 바위를 친 게 아니라, 바위로 계란을 깨뜨린 거지..... 썩은 계란으로 쌓아 올린 거대한 피라미드를 흔든 건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었지.
여성의 이름으로
어머니가 아니라, 아내가 아니라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그래야, 이 삐뚤어진 세상이 제대로 보인다.
2부에서는 문학계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내용들과, 그로 인해 지리멸렬한 고통을 감내하는 그녀의 분노와 외로움이 느껴진다.
썩은 계란으로도 피라미드는 쌓아진다는 사실이 참으로 믿을 수 없다. 하지만, 무너질 수밖에 없겠지. 그래야만 하는 거니까.
<제3부 다시 오지 않는>
시골 장례식
용문에서 목격한 어느 죽음,
앞산 뒤뜰이 떠들썩하게 소리와 색으로 물들어
꽃 같은 죽음.
생일잔치 같은 장례식.
이 세상에 나올 때,
그리고 들어갈 때만 화려한 사람들.
시 전문이다. 너무 공감이 갔다. 장례식이 쓸쓸할까 봐, 조문객들이 적게 올까 봐, 화환이 적게 들어올까 봐, 초라할까 봐, 왜 걱정을 하나? 죽고 나면 다 모를 것을. 이 또한 살아있는 사람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함인가. 살아생전에 쓸쓸하지 않게, 꽃처럼, 매 순간 생일처럼 화려하게 챙기고 사는 것은 왜 이리 어려운가?
<제4부 심심한 날>
베스트셀러
지식이 상품으로 변신한 순간, 거짓이 진실보다 잘 팔리는 시장에서 누구의 거짓이 더 오래갈까......모래처럼 가볍게 돌아다니며 서점에 진열된 황금빛 시끄러운 띠지를 두른 아무도 무시하지 못하는
황금빛 시끄러운 띠지를 두른... 하. 아무리 화려한 스펙과 지위, 글솜씨가 있다 한들 우리의 선택은 올바른 것일까? 그 이면에 숨긴 정체는 어찌 알아볼 수 있을까?
카페 가는 길
바람이 나를 밀어 세게 밀어. 앞으로 앞으로 힘들이지 않고 이렇게 살았으면, 바람이 시키는 대로 흘러 흘러 어디엔가 닿았겠지. 거리의 먼지를 깨물고 머리카락이 엉키고 목을 때리는데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바람이 신기해..... 따끈한 빵 냄새를 향해 금방 구운 빵을 차지하려 헤벌리고 뛰어가는 나의 종착지는 에티오피아 시다모
바람이 미는 대로 사는 인생. 종착지는 어디일까. 행복에 닿아있을까?
바람을 거스리며 사는 인생은 또 어떠할까. 결국, 원하는 것을 얻을까?
결국 맛있는 커피 한 잔에 목숨 거는 연약하고도 단순한 인간들인데.
쓰는 인류
5천 년 전 수메르인. 그들은 진흙에 소중한 것들을 기록했다. 이렇게 한 번 새긴 글들은 굳어져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것들이 되었다. 진흙판을 깨지 않고는 말이다. 그러나 삶이 윤택해지고 기술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된 우리 지금은. 그 진실됨과 무거움을 무시한 채 가벼운 말들과 지켜내지 못할 글들을 쏟아낸다.
지우개를 발명하고
사랑과 증오를 오려 붙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댓글은 차단하고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고
심심해서,라고 말하는 인류는
조금 불편하게 살아도 진실되고 진지한 그들은 미개인 같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지금 그렇게 보인다.
.....
시 군데군데 드러나는, 요양원에 모신 노모를 간호하고 보살피는 시인의 상황과,
피고로서 겪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겹쳐진다.
해서, 이 시집은 봄날과 같은 따스한 시모음이라기보다는 어둡고 우울하며 적의에 차 있는 불편한 시들이다.
알아야 할 진실들. 삶의 종착역. 어떻게 살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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