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가을 어느 날, 정동길에서 마주친 신랑과 신부.

행복한 미소를 수줍게 짓던 신부의 얼굴과, 예쁜 신부를 곁에 두고 행복에 겨운 신랑의 얼굴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결혼은 부모를 떠나 둘 만의 인생을 시작하는 날이자 새로운 가족의 탄생일이다.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 위대한 사랑의 시작.

부부는 한 가정을 알뜰살뜰이 가꾸고 사랑의 약속을 지키며 책임을 다한다.

 

 

 

 

24주년을 일찌감치 기념하며 온 가족이 부산 여행을 다녀왔다. 함께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었다.

 

 

 

 

 

결혼기념일 전 주말, 남편과 군산에서 바라본 해넘이는 황홀했고,

 

 

 

 

 

딸아이와 함께 보낸 하루는 눈이 부셨다.

 

기념일 아침 일찍, 딸이 보내온  정성과 배려가 듬뿍 담긴 선물.

그 안에 담긴 사랑이 느껴져 마음이 울컥한다.

 

결혼기념일은 둘 만의 기념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 준 소중한 가족.

 

온 가족의 시작일이자, 사랑의 탄생일. 

책임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온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함께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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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정체성>, <불멸> 이후 이 책을 보았다. 어쩌면 밀란 쿤데라의 유작이 될지 모를 소설, <무의미의 축제>는 그의 생각을 정리한 책이 아닐까? 라는 마음으로 읽었다.

주인공들에게 진한 우정을 느끼는 작가의 시선은 여전히 따뜻했고, 책에 스며있는 그의 사상과 문체, 세련되고 독특한 전개 방식 등 낯설지 않은 느낌이 좋았다. 

 

 

 

 

많은 사람들은 의미 있는 순간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의 선택에 의미를 부여하고 뿌듯해하며, 우연히 생긴 일에도 의미를 선사한다. 

그럼으로써 생기있는 행복감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매사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다 보면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칠 수 있고, 삶이 곤하고 불행할 수도 있다.

하나의 농담에 진지한 의미를 두면 관계나 상황을 무겁게 만들 수 있다.

무엇보다, 의미있는 일과 무의미한 일에 대한 미묘한 경계의 판단은 개인적이기에 타인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다.

 

 

 

 

의미 있는 일에 집중하고 살았다면, 무의미한 일들에 대한 작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외모나 몸매 성격 등의 개별성보다는, 비슷하고 무의미한 배꼽에 매력을 느끼는 획일성을 가진 시대.

알랭이 뤽상부르 공원을 거닐다 느낀 무심하게 고요하고 평온한 행복감.

다르델로의 세련되고 기교 섞인 말보다, 카클리크의 주의를 끌지 않는 보잘것없는 태도에 반하는 여성들.

파티 장소 위를 떠다니는 의미 없는 깃털 하나에 쏠린 사람들의 시선.

 

전립샘 비대증을 가진 칼리닌은 스탈린 앞에서 소변을 참지 못하고 실수했던 보잘것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기의 악마 스탈린은 그에게 특별한 정을 느끼고 칸트가 살던 도시에 유명인사가 아닌 칼리닌의 이름을 붙였다.

 

팬티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괴로움을 견딘다는 것...... 청결의 순교자가 된다는 것...... 생기고, 늘어나고, 밀고 나아가고, 위협하고, 공격하고, 죽이는 소변과 맞서 투쟁 하나는 것...... 이보다 더 비속하고 더 인간적인 영웅적 행위가 존재하겠냐? 나는 우리 거리들에 이름을 장식한 이른바 그 위인이라는 자들은 관심 없어. 그 사람들은 야망, 허영, 거짓말, 잔혹성 덕분에 유명해진 거야. 칼리닌은 모든 인간이 경험한 고통을 기념하여, 자기 자신 외에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은 필사적인 투쟁을 기념하여 오래 기억될 유일한 이름이지.

 

 

 

 

 

시대의 작가는 그의 말, 글 그리고 행동으로 세상이 달라지기를 얼마나 고대하며 살아왔을까?

만고의 노력 끝에도 한심한 세상을 바로잡을 도리가 없다는 것을 작가도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이런 희망 없는 세상을 어떻게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까?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네 성도 마찬가지로 네가 선택한 게 아니야.  네 눈 색깔도, 네가 태어난 시대도, 네 나라도, 네 어머니도. 중요한 건 모든 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권리들이란 그저 아무 쓸데없는 것들에만 관련되어 있어. 그걸 얻겠다고 발버둥 치거나 거창한 인권선언문 같은 걸 쓸 이유가 전혀 없는 것들!"

 

모든 것이 진지하고,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세상, 농담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심지어 역겨운 거짓말로 여겨지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는 삶이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고통받으며 살기보다는, 소소하고 일상적이지만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들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다. 

 

 

 

 

"나는 원체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그런 것들,............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 멎는 곳에서 죽는 것이 나의 꿈이라면 꿈이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김희성의 대사다.

그는 무의미한 것들을 사랑하며 인생을 가볍게 살려고 했지만, 결국 시대적 상황과 무거운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이제 나한테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더 강력하고 더 의미심장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로맹 가리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의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무의미의 축제>의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이 문장들이 계속 동일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표지 그림은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이다. 

물에 빠진 오필리아의 머리 위로 버드나무, 치마폭에 팬지, 손에 움켜잡은 양귀비, 쐐기풀 등 사실적으로 묘사된 그림은 신비롭고 낭만적이나 오싹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열아홉 살 때 그림의 모델이었던 엘리자베스 시달은, 서른셋의 이른 나이에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고 한다.

그 사연을 알고 보니 더 섬뜩하다.

 

표지 읽기만으로도 이 책이 비극임을 알 수 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민음사의 책에서는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번역되어 조금 생소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단지 '삶과 죽음'에 집중하기보다는, 인간 존재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기에 'To be or not to be'를 '있음과 없음'으로 해석하였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결국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 대한 복수에 실패한다.

선왕을 죽이고 왕좌와 어머니를 차지한 삼촌에게 복수를 결심한 햄릿은 완벽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실행하지 못한다.

그때 실행했더라면, 무고한 사람들과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덴마크가 노르웨이의 포틴 브라스 왕자에게 넘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햄릿이 기회의 순간 망설였기에 최악의 비극이 탄생했다. 그 때문에 햄릿은 우유부단한 인물로 종종 비유된다.

하지만 햄릿을 우유부단하다고 탓하고만 싶지는 않다.

 

복수의 기회는 왕 클로디어스가 형을 독살한 일에 대한 후회로 기도를 드리던 순간이었다. 

그때 죽인다면 온갖 악한 일을 도모한 그의 영혼은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햄릿은 망설였을 것이다.

아서라 칼아, 더 끔찍한 상황을 만나자. 놈이 취해 잠자거나 광란하고 있을 때, 침대에서 상피 붙어 쾌락을 즐길 때, 경기 도중 욕하거나 구원받을 기미가 전혀 없는 행동을 하고 있을 바로 그때, 다리를 걸자.

 

 

또한 자신 앞에 나타난 선왕 유령의 창백한 얼굴을 어찌 간과할 수 있었을까.

한창 죄업을 쌓고 있는 중에 잘렸으니, 성체 받고 기름 바르는 고해성사도 없이, 죄를 청산하지도 못하고 온갖 결함을 내 머리에 인 채 심판대로 보내졌다. 아, 무섭다! 아, 무섭다! 정말 무섭다!

 

 

 

 

햄릿은 견딜 수 없는 현실에 반발하며 무모한 언행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신중하고 순수한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이다.

그는 존재에 대한 고뇌를 끊임없이 하며, 삶에 대한 돌파구를 모색했던 인물이다.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무기 들고 고해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끝장을 내는 건가. 죽는 건, 자는 것일 뿐이다. 잠 한 번에 육신이 물려받은 가슴앓이와 수천 가지 타고난 갈등이 끝난다 말하면, 그건 간절히 바라야 할 결말이다. 

죽는 건, 자는 것. 자는 건 꿈꾸는 것일지도, 그게 걸림돌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잠 속에서 무슨 꿈이, 우리가 이 삶의 뒤엉킴을 떨쳤을 때 찾아올지 생각하면, 우린 멈출 수밖에. 그게 바로 불행이 오래오래 살아남는 이유로다. 

왜냐면 누가 이 세상의 채찍과 비웃음, 압제자의 잘못, 잘난 자의 불손, 경멸받는 사람의 고통, 법률의 늑장, 관리들의 무례함, 참을성 있는 양반들이 쓸모없는 자들에게 당하는 발길질을 견딜 건가? 단 한 자루 단검이면 자신을 청산할 수 있을진대. 누가 짐을 지고, 지겨운 한 세상을 투덜대며 땀 흘릴까? 

국경에서 그 어떤 나그네도 못 돌아온 미지의 나라, 죽음 후의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의지력을 교란하고, 우리가 모르는 재난으로 날아가느니, 우리가 아는 재난을 견디게끔 만들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양심 때문에 우리들 모두는 비겁자가 되어버리고, 그럼에 따라 결심의 붉은빛은 창백한 생각으로 병들어 버리고, 천하의 웅대한 계획도 흐림이 끊기면서 행동이란 이름을 잃어버린다. 

 

 

목숨은 하나를 셈보다 길지 않고 반 푼 값어치도 없다. 그와 반대로 영혼은 불멸한다.

죽음으로 육신의 고통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죽음 이후 미지의 세계는 우리를 두렵게 한다.

또 하나, 복수를 위한 살인은 선인가 악인가?  복수의 양면성 또한 단칼의 휘두름을 머뭇거리게 했을 것이다. 

결국, 신중함인지 우유부단함이지 모를 햄릿의 행동으로 덴마크 왕족 모두는 죽음 저 너머로 가게 된다.

 

 

 

 

희곡으로 읽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은유 안에 담긴 메시지들을 파악하는 것이 어려우면서도 책 읽는 재미를 더했다.

햄릿이 가지고 있는 선과 악, 우유부단함과 단호함, 단순함과 고뇌, 순리와 역리 등의 공존은 '작은 햄릿'인 우리들 안에서도, 극의 다른 등장인물들에게도 발견할 수 있었다.

 

 

 

 

연극 <햄릿>이 서울, 국립 해오름 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거장 배우들과 젊은 배우들의 연기 조화가 궁금한 이 연극은, 매회 기립 박수가 나온다는 기사가 더해져 기대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번 주말로 예매된 연극이, 어떤 감동과 깨달음을 줄지 기다려진다.

 

 

 

 

 

 

 

여수의 밤은 화려했다.

 

 

 

 

돌산대교와 거북이 대교 불빛은 시시각각 색이 바뀌었고, 케이블에 매달린 50대의 곤돌라는 둥글고 하얀 조명을 깜빡이며 바다 위를 아찔하게 운행했다.

 

 

 

 

 

 

 

하멜등대는 5초에 한 번씩 빛을 깜빡거리며 광양항과 여수항을 오가는 선박을 지켜주고 있었고, 빨간 등대는 조명을 받아 낮보다 더 선명해졌다.

 

 

 

 

 

 

 

운행하는 거대한 크루즈 선수 위로 화살 같은 빛이 던져지고, 그 빛이 터지며 색색의 불꽃이 까만 밤하늘에 별처럼 나린다. 선상에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떨어지는 불꽃을 시야 가득 채우는 그 순간은, 멀리서 지켜봤던 불꽃놀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높고 낮은 건물들에서 새어 나오는 따뜻한 빛들, 언덕 위 벽화마을을 밝힌 불빛, 형형색색의 조명이 밤바다에 비쳐 섞이며 너울거렸다. 화려한 빛의 향연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말랑해지며 벅차올랐다.

 

 

 

 

 

paul frank Cafe.

 

Cafe 여수에서,

 

Cafe, MOI FIN

 

 

한낮 더위는 감성이 넘치는 작은 카페와 여유로운 대형 카페에서 달랬고, 국내 최대 규모의 아쿠아리움에서 탄성을 지르며 동심으로 돌아가 보기도 했다.

 

 

 

 

 

 

 

여수에서 먹어봐야 하는 음식 몇 가지를 먹었다. 속이 꽉 찬 게장정식은 기본이다.

삼겹살, 문어 그리고 갓김치의 조합이 환상적이었던 삼합은 다시 먹고 싶다. 시원한 문어라면, 이름이 예뻤던 목하 식당의 깔끔한 덮밥, 마지막 날 사치를 부려보았던 호텔 조식도 만족스러웠다.

 

 

 

 

 

 

 

긴 대기 끝에 살 수 있었던 쑥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이순신광장 한 편에 앉아 먹기도 했다.

 

 

 

 

 

소노캄 호텔

 

 

바다, 오동도 뷰로 일출을 감상할 수 있었던 접근성 좋았던 호텔과, 붉은 노을로 믈들었던 여수의 해 질 녘 모두 잊지 못할 것 같다.

 

 

 

꿈만 같았던 휴가.

온 가족이 함께여서 더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성숙하고 철이 든 자녀들과의 여행이 참으로 편안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네게 들려주고파~"

장범준의 노래 가사처럼, 여수에 담긴 우리들만의 이야기가 풍성하게 생겼다.

 

 

살아온 날들이 감사했고, 

살아갈 날들이 기대되었다.

그리고, 여수에서의 순간 순간이 너무 소중했다.

 

 

다시 힘을 내야 할 시간.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 또 하루 하루의 삶을 살아야 한다.

 

10월에 예정된 부산 여행이 벌써부터 맘을 설레게 한다.

 

 

 

 

 

 

 

 

 

민음사

 

 

 

 

밀란 쿤데라의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불멸>, 두 소설 제목이 주는 느낌은 강렬하게 달랐었다.

그래서인지 <불멸> 속에 등장하는 저자와 그의 친구 아베나리우스 교수의 대화를 읽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 소설의 제목은 뭔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니 그 제목은 이미 써먹지 않았는가."
"그래 써먹었지!  하지만 그때 난 제목을 잘못 달았어. 그 제목은 지금 쓰는 소설에 붙여야 했어."

 

 

<불멸>의 또 다른 제목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다.

 

 

 

 

 

 

불멸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지 않다.
작은 불멸, 말하자면 생전에 알고 지낸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어떤 인물에 대한 추억과 
큰 불멸
, 즉 생전에 몰랐던 이들의 머릿속에도 남는 어떤 인물에 대한 추억은 구분되어야 한다.
사실 어느 날 갑자기 한 사람을, 도무지 사실 같지 않고 있음 직하지 않은, 그러면서도 이론의 여지없이 가능한 그런 엄청난 불멸에 맞닥뜨리게 하는 생애들이 있다. 바로 예술가와 정치가의 생애가 그렇다.

 

 

괴테, 나폴레옹, 베토벤, 랭보, 헤밍웨이........

소설 속에도 등장하는 위 인물들은 불멸의 존재들이다.

 

위 인물들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포털 검색창에 이름을 치면 끊임없이 나오는 그들의 업적, 성품, 연인들, 일화,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누구의 시선으로 작성되었나? 심지어 카메라와 녹음기가 없을 당시의 삶은 어떻게 전해졌을까? 

 

수많은 사람들의 의견과 해석, 책과 영화 등을 참고로 우리는 그들의 이미지를 갖게 된다.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을 추측하고, 랭보의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었던 인생'과 베를렌과의 동성애, 19세에 시 쓰기를 포기했던 사실로 그를 판단한다. 괴테와 베토벤의 산책 중 모자 일화로 괴테는 귀족 신분을 열망했다는 이미지를 피할 수 없게 된다. 헤밍웨이는 또 어떤가. 그의 허영, 노년의 정신질환과 자살은 사람들의 관심을 자극한다.

 

그 위대한 인물들은 후세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원치 않는 날카로운 일격을 당한다.

 

 

헤밍웨이가 말한다. "보세요, 요한, 나 역시 그들의 영원한 구형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신세랍니다. 나의 책을 읽는 대신 그들은 나에 관한 책을 써 댑니다. 내가 여편네들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하고, 아들을 잘 돌보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어느 비평가의 입을 찢어 놓았고, 성실하지 않았으며, 너무 오만했고, 남성우월주의에 사로잡혔다고도 합니다, (.............)" 

"그것이 바로 불멸인 걸 어쩌겠습니까." 하고 괴테가 대답한다. "불멸은 영원한 소송이죠."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어요. 하지만 자신에 불멸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입니다. 일단 불멸의 배에 오르고 나면 영원히 내릴 수가 없지요.

 

 

 

 

 

 

소설 속에는 불멸을 욕망했던 두 여인이 등장한다.

 

베티나와 로라의 그 몸짓을 불멸에 대한 욕망의 몸짓이라 명명하자. 큰 불멸을 갈망하는 베티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현재와 더불어, 현재의 온갖 근심과 더불어 사라지길 거부한다. 나는 나 자신을 초극하여 역사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역사는 영원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작은 불멸을 희망할 뿐이지만, 로라 역시 같은 것을 원한다. 자기 자신을 초극하고 자신이 겪는 불행한 순간을 초극하여, 자신을 알았던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 머무르기 위해 뭔가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괴테의 연인으로 불멸하고 싶었던 베티나와, 자신을 아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름답게 남고 싶어 했던 로라는 잔인하게, 끊임없는 노력으로 불멸의 기차에 승차하는 데 성공한다. 

 

 

 

 

 

 

반면에, 아녜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는 것이었다. 시선들의 부재를 동경했다.

자신의 영혼, 실재와 굳게 연계되어 있는 얼굴을 보며 혼란에 빠지고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 얼굴이 도대체 뭐가 중요하지?"

내가 선택하지 않은 얼굴, 몸, 귀의 생김새뿐만 아니라, 우연히 아녜스의 삶에 주어진 그녀의 동생 로라를 일생동안 끌고 다녀야 했던 아녜스는 행복하지 않았다.

 

추함의 습격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정도가 되는 날, 그녀는 꽃 장수에게 물망초 한 가지를 살 것이다. 가는 줄기 끝에 작은 꽃이 달린 물망초 한 가지만 사서, 얼굴 앞에 세우고 외출을 할 것이다. 그녀에게 쏠리는 시선이 그 예쁜 푸른 점 외에, 이제 사랑하기를 그만둔 이 세상에서 그녀가 보존하고 싶은 그 최후의 이미지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보지 못하도록 말이다.

 

 

불멸은 고사하고 세상의 작은 시선도 불편했던 아녜스는 자신의 영혼, 자신의 본질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실재보다는 겉모습과 평판이 중요한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으며, 작은 두 손, 혹은 물망초 한 송이로 부끄러움을 가리고 자신의 이미지를  바라보고 싶었을 것이다.

왜 인간은 자신이 어쩔 수 없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가? 

 

인생에서 견딜 수 없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로 존재하는 것이다. 
(............)
산다는 것, 거기에는 어떤 행복도 없다. 산다는 것,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고통스러운 자아를 나르는 일일 뿐이다. 하지만 존재, 존재한다는 것은 행복이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샘으로, 온 우주가 따뜻한 비처럼 내려와 들어가는 돌 수반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나는, 죽는다면 누구에게 기억되고 싶은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창작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명예에 대한 욕망이 있는 사람들은 역사까지는 아니라도 대중의 기억에 남고 싶을 것 같다. 

나에게 그런 욕망은 없다. 나의 사후에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들,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지인들 정도가 나를 기억할 것이다. 그것도 잠시의 기억 후에 잊힐 것이다. 

 

불멸을 꿈꾸진 않지만, 현세 혹은 사후에 좋은 이미지로 기억되고 싶고 남고 싶은 바람이 없다면 그건 거짓일 거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나를 꾸미고, 자신의 이미지에 대해 염려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미숙함과 연약함이다.

 

그러나 내가 보는 것과는 다른 식으로, 나의 생각과는 다른 모습으로 남들은 나를 바라볼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두려워진다.

 

 

아마 우리는 왜, 그리고 어떤 점에서 우리가 타인들의 신경에 거슬리는지, 우리의 어떤 점이 그들에게 호감을 주며, 어떤 점이 우스꽝스러워 보이는지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이미지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큰 미스터리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이미지 뒤에 숨을 수 있고, 우리 이미지 뒤로 영원히 사라져 버릴 수 있으며, 우리 이미지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도 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이미지가 아닌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아마 그들이 원했던 모습의 이미지로 남지 못했을 것이다.

대부분 영원히 폭발하지 않으나 지뢰 하나가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날이 오듯이, 하찮은 에피소드 하나가 당신을 무너뜨릴 수 있다. 진지했던 인생 전체를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이미지를 속이고 이미지에 속는다.

 

말러의 7번 교향곡의 엄청난 완성도는 우리 능력을 넘어선다. 아무리 광적일 정도로 주의 깊은 방청객이라 해도, 그 교향곡에서 포착하는 건 담긴 내용의 100분의 1 정도일지 모른다. 그것도 말러가 보기에 가장 중요하지 않은 100분의 1말이다.

밀란 쿤데라가 고르고 골라 쓴 한 단어, 한 문장, 한 부, 한 편의 소설을 그의 의도대로 독자들은 얼마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100분의 1은 될까?

한 존재의 삶의 깊이와 본질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들의 이미지는 그들이 아니다.

 

그러니 불멸하는 존재조차, 참을 수 없이 가벼울 수밖에.

 

 

 

 

 

 

존재하지 않는 자는 있을 수 없다. 모든 권리를 잃어버린 죽은 자의 사생활은 사적이길 멈춘다. 생전에 썼던 편지, 유품과 사진, 했던 말까지도 이젠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 불멸은 없다. 인간은 멸하는 존재이다. 떠들어 대는 모든 불멸, 즉 영원한 소송이란 한낱 바보짓일 뿐이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멸한다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인간 경험인데도, 인간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그에 따라 처신하려 한 적이 없습니다. 사람은 멸하는 존재가 될 줄 몰라요. 죽어 놓고도 죽은 줄 모르지요.

 

 

 

 

 

 

하나의 몸짓으로 탄생했던 소설 속 주인공 아녜스. 그녀의 몸짓은 그녀만의 것이 아니었다.

수영장의 우아한 노부인의 몸짓, 아버지의 아름다운 여비서의 몸짓, 그리고 그녀의 몸짓을 따라 했던 로라의 그것이기도 했다. 결국 폴에게 기억되는 불멸의 몸짓은 로라의 것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기억되는 가장 아름다운 몸짓은 아녜스의 그것이다. 그녀에게 연민을 느낀다.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렸고, 성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예전에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아녜스는 물망초 한 가지를, 물망초 오직 한 송이를 사고 싶어 했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아름다움의 마지막 자취로서, 그것을 두 눈앞에 간직하고 싶어 했다.

 

 

그녀의 아름다움의 마지막 자취 물망초, forget me not, 작고 푸른 꽃 한 송이가 그녀의 여리고 여린 이미지를 대변하는 듯했다. 그녀가 기억되기 원하는 그녀의 실재, 그러나 결코 누구도 알 수 없는 그녀의 영혼, 꽃 한 송이.

 

 

 

 

 

 

소설 속에 저자가 등장하여 주인공들과 관계를 맺고, 세월을 거슬러 역사 속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하며, 다른 시대에 살았던 괴테와 헤밍웨이의 만남 등 독특한 구조를 가진 소설이다. 소설은 읽기 쉽지 않았지만 흥미로왔고, 두 번째 읽을 때 조금 고개가 끄덕여졌으나, 역시 많은 부분은 이해하지 못한 채 남아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며 많은 것을 배우고, 사색하게 된다. 

 

 

 

 

 

 

 

 

 

 

 

 

경교장.

이름도 생소한 이곳은 있는 곳도 낯설다.

응급차가 수시로 도착하고,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링거를 꽃은 채 돌아다니는 강북 삼성병원 내에 위치한다.

 

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로,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하신 장소이기도 하다.

그의 죽음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은 채, 오랜 세월 경교장은 잊혔었다.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의 결과, 다행스럽게도 현재는 그를 기억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경교장을 위협하고 있는 듯 병원 건물이 뒤에 바짝 서 있어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았다.

 

 

 

 

 

입구를 들어서자 백범 김구 선생의 흉상이 건장하고 결의에 찬 모습으로 서 있었다.

 

해방 후, 친일파 사업가 최창학은 자신의 저택을 김구 선생에게 빌려주었고, 이곳이 대한민국 임시청사로 사용되었다.

경교장의 원 모형이 축소되어 전시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주차장과 병원 건물들로 분주한 저택의 외부에는 원래 정원과 한옥이 있었다고 한다.

 

 

 

 

 

지하부터 2층까지 구석구석 돌아보았다.

곳곳에 있는 사진 자료들과 비교하며 천천히 둘러보니, 오랜 세월 다른 곳으로 이용되었지만 당시의 모습을 잘 재현해 놓은 듯했다. 

 

 

 

 

 

1층에 있는 귀빈 식당은 그의 서거 후 빈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1층 관람 후, 지하로 내려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걸어온 길과, 임시정부 요인들 그리고 그의 생전 자료들과 유품 등을 전시한 공간이었다.

 

 

 

 

 

방문객이 그리 많지 않아 고요해서인지 알 수 없는 경건한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한 자 한 자 차분하게 읽어보니, 파란만장했던 경교장의 역사를 자세히 알 수 있었다.

 

 

 

 

 

피로 물든 그의 저고리가 세월과 함께 색이 바래고 흐려져 있다.

죽을 고비를 수십 차례 넘겼을 그가, 같은 민족의 손에 허무한 죽음을 맞다니 정말 비통할 뿐이다.

 

 

 

 

 

윤봉길 의사의 거사 당일, 서로 맞바꾼 회중시계를 김구 선생은 늘 지니고 다녔다 한다.

 

"우리 지하에서 만납시다."

 

그들의 마지막 인사는 그렇게 결연하고 슬프게 현실이 되었다.

 

 

 

 

 

온전한 독립을 꿈꿨고, 부강한 나라보다는 아름다운 나라를 바랐던 그의 소망.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부와 힘, 결코 부리지 않은 욕심, 그 당연하고 소박한 꿈은 정녕 이룰 수 없는 것일까?

 

반복되는 역사를 바라보며 잡을 수 없는 그 빛에 가슴이 무너진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양 쪽으로 두 군데 있었는데, 어느 쪽으로 암살자 안두희가 올라갔는지 궁금했다.

 

 

 

 

 

그의 침실 창 옆으로 책상 하나. 이곳에 앉아 있는 김구를 향해 육군 소위 안두희는 4발의 흉탄을 발사한다.

 

 

 

 

 

뒷 유리창에 새겨진 흉탄의 흔적을 선명히 볼 수 있었는데 사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음이 무거워졌던 2층 전시를 끝으로 경교장을 나왔다.

해방 후, 자신의 안위를 위해 저택을 빌려주었을 친일파 최창학, 누군가의 사탕발림으로 범행을 저지르고 협박으로 침묵했을 안두희, 그 모든 것을 조장했을 엄청난 배후세력.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삶의 노선을 정한 사람들이 그때도 지금도 얼마나 많은지....... 

 

 

 

한여름 더위가 시작된 듯 햇살이 따가웠다.

내리쬐는 햇살을 맞으며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홍난파 가옥

근린공원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머지않아 <고향의 봄> 작곡가 홍난파가 생의 마지막 6년을 보낸 집이 보였다.

내부 관람은 할 수 없었지만, 담쟁이로 덮인 적벽돌 2층 가옥은 아담하고 예뻤다.

독립운동에서 친일로 이어진 그의 생에 대해 많은 의견들이 있지만, 죽은 자에 대한 모든 말은 확인받을 방법이 없다.

 

 

 

 

 

딜쿠샤

 

감각적인 현대식 아파트를 지나 조금 더 오르면 큰 은행나무 근처 붉은 벽돌 건물을 만날 수 있다.

 

페르시아어로 딜쿠샤(DILKUSHA)는 '기쁜 마음'이라는 뜻이다.

미국인 테일러 부부가 머물던 공간이다. 앨버트 W. 테일러는 광산 기술자 아버지를 돕기 위해 조선에 입국한 후, 광산과 상회를 경영하기도 했다. 1919년 연합 통신원으로 활동하면서 고종 국장, 3.1 운동, 제암리 학살 사건 등을 취재하였다고 한다. 1942년 외국인 추방령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당한 후 테일러 부부는 늘 한국을 그리워했다고 전해진다.

 

 

 

 

서로 다른 집, 세 곳을 보았다. 경교장, 홍난파 가옥, 딜쿠샤.

1930년대 어느 시기에는 머지않은 곳에 사는 이웃이었을 최창학, 홍난파, 테일러 부부를 생각하니 소름이 끼친다.

그들만의 사연들이 있을 법도 하다.

 

 

 

 

Cafe Loco Fefe

병원 쪽으로 내려가는 길, 꿈길에나 볼 법한 Cafe들이 연이어 있고 꽃과 화분으로 치창된 화원이 있는 공간이 있다. 그중 초록 문의 한 카페에 들어갔다. 커피는 맛있었고 가격도 적당했다. 

 

 

잠깐의 휴식과 함께 여러 가지 감정과 많은 생각을 부른 시간여행을 마무리했다. 

 

 

 

 

 

 

 

 

 

 

 

민음사

 

 

 

 

밀란 쿤데라의 이 책은 결코 쉽지 않지만 재미있다.

테레사, 토마스, 사비나, 프란츠.

추구하는 삶이 다른 네 주인공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또 너무 비슷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볍다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

인간의 삶은 가벼운 것일까 무거운 것일까?

가벼운 것은 무엇이고 무거운 것은 무엇일까?

 

파르메니데스는 대답했다. 가벼운 것은 양이고 무거운 것은 음이다라고. 그의 대답이 옳았는가? 아니면 틀렸는가? 이것이 문제다. 확실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즉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의 대립 쌍은 모든 대립들 중에서 가장 신비롭고 가장 타의적이라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와 다르게 베토벤에게는 무거움이 명백히 어떤 긍정적인 것이었다. <힘겹게 내린 결심>은 운명의 소리 <그렇게 할 수밖에!>와 연관되어 있다. 무거움, 필연성, 가치는 서로 긴밀히 연관된 세 개념이다. 필연적인 것만이 무겁고, 무게가 있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

 

가벼움과 무거움, 육체와 영혼, 우연과 운명, 무관심과 동정, 비밀스러운 사랑과 공개적인 사랑, 짐과 가벼움, 오락성과 책임......... , 우리의 삶은 하나의 길을 선택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한다.

 

 

 

 

테레사는 토마스에게 온전한 사랑을 요구하며 그의 외도를 괴로워했지만, 때때로 가벼운 것으로의 동경을 느꼈다.

 

토마스는 여러 여인들과의 관계를 갖으며 가벼운 인생을 즐겼지만, 운명처럼 나타난 테레사를 사랑하며 동정과 책임감을 느낀다.

 

프란츠는 진실에서 살았다. 그러나 사비나를 사랑하게 되며 아내를 속인다. 결국 아무것도 비밀로 하지 않을 것을 추구했던 프란츠는 사비나와의 관계를 털어놓고 온전한 사랑을 꿈꾸었다. 그러나 공개적이 된 사랑은 무거운 짐이 되어 사비나는 그를 떠나게 된다. 무거운 것을 요구하는 남성과 가벼운 것을 원했던 여성의 끝은 이별이다. 영화 <클로저>의 두 주인공 댄과 앨리스처럼 말이다.

 

인간의 삶은 단 한 번 뿐이라는 것으로서, 바로 이 때문에 우리들 결단에서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이 나쁜가를 우리는 결코 확정 지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단 한 번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내린 서로 다른 결단들을 서로 비교할 수 있도록 제2, 제3, 제4의 삶이 우리에게 선사된 경우는 없다. 

 

토마스가 테레사에게 연락처를 주지 않았다면, 테레사가 프라하로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프란츠가 사비나와의 관계를 비밀로 했다면, 사비나가 프란츠를 떠나지 않았다면.............

사람이 추적하는 목적은 언제나 베일에 가려 있고,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언제나 전혀 미지의 것이기에 우리는 아무것도 확정 지을 수 없다.

 

 

 

 

한 번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보헤미아의 역사는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역사도 그렇다. 보헤미아의 역사와 유럽의 역사는 불행하게도 인류의 무경험에 의해 그려진 두 개의 스케치다. 역사란 개별적인 인간의 삶과 똑같이 가벼운 존재다. 그것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휘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먼지처럼 날아가버릴 인간의 삶은 얼마나 가벼운가. 그러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감추고 우리는 또한 얼마나 무겁게 살고 있는가. 책을 읽은 후 오래도록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해 생각했지만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가벼운 인생을 살고자 하면 무거운 것들로의 동경이 생긴다. 무겁게 되고자 하면 가벼움을 갈망하는 현기증을 느끼게 된다.

가벼움과 무거움은 한 발자국 차이이다.

 

사비나는 진실을 커튼 뒤에 숨기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을 적으로 여겼다.

아름다운 가면, 아름다운 거짓, 완벽해 보이는 모순들, 죽음을 가리는 병풍, 거짓과 위선, 진실을 감추는 언론들과 같이 저속한 것, 즉 키취를 말이다.

 

평생 동안 그녀는 자기의 적은 키취라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자신 속에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모순되게도 사랑하는 어머니와 현명한 아버지가 이끄는 행복한 가정의 이미지를 늘 가지고 살았다.

실제로 그녀의 가정과는 모순된 이미지를 말이다.

 

지극히 가벼운 것을 추구했던 사비나의 인생 역시 무거운 것으로 눌려있다. 오히려 그 무게를 부정하고 배반하며 가볍게 가볍게 되려고 했던 그 처절함이 무겁게 느껴진다.

 

 

 

 

캄보디아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서 남는 것은 무엇인가? 
아시아의 아기 하나를 품에 껴안고 있는 미국 여배우의 큰 사진 하나. 

토마스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
하나의 비문. <그는 지상에서 천국을 바랐다>는 비문. 

베토벤에게서 남은 것이 무엇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텁수룩한 머리를 한 무뚝뚝한 남자. <그렇게 할 수밖에!>라고 저음으로 말하는 남자. 

프란츠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 
하나의 비문. <긴 미로 끝에 되돌아가다>라고 새긴 비문. 

기타 등등. 사람들이 우리를 망각하기 전에 우리는 키취로 바뀐다.
키취는 존재와 망각 간에 갈아타는 정거장이다.

 

한 존재의 죽음으로 그의 인생 전체는 부정된다.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떤 선의를 베풀었고, 어떤 악행을 했는지 사람들은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다. 그저 하나의 이미지로 포장한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를 자신의 구미에 맞게 판단하고 전달하고 보도한다. 거짓되고 사실이 아닌 것을 아무렇게나 저속하게 말이다. 

아름답게 포장되던, 우스꽝스럽거나 비열하게 포장되던, 거짓인 것들은 모두 끔찍하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너무 가벼운 존재들이 되어버린다.

존재의 가벼움은 참을 수 없이 화가 나고 슬프고 허무하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맴돌지 않고 직선으로 진행된다. 이것이 왜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가 하는 이유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반복을 갈구하는 소망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함께 나란히 앉아 있던 그때처럼,  지금 그녀는 그때와 똑같은 행복을, 독특한 슬픔을 체험했다. 이 슬픔은 <우리는 종착역에 도착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는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은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먼지처럼 사라질 허무하고 가벼운 인생이지만, 삶의 고단함과 부조리함 슬픔과 고통은 또 피해 갈 수 없다.

그러니 파르메니데스의 견해대로 대기보다 더 가벼워질 존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하루하루 피할 수 없는 가치와 무게 그리고 운명을 베토벤 처럼 이겨내는 수밖에 말이다.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볍지만, 그것이 또한 무거움을 견디게 한다. 

 

 

 

 

 

여전히 철학적이고 어려운 이 책은 밀란 쿤데라의 또 다른 소설 <불멸>의 내용을 궁금하게 한다.

'불멸'이란 제목은 '존재의 가벼움'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상당한 분량에 어려운 책이지만 도전해 보려고 한다.

 

 

 

 

 

 

 

 

 

 

 

 

 

 

 

 

민음사 책의 표지는 호퍼의 그림이다.

추운 겨울, 장갑 한쪽을 낀 채로 자동판매기 식당에 홀로 앉아 차를 마시는 여인.

우아하게 차려입은 창백한 여인의 얼굴에 개츠비의 상실과 외로움이 겹쳐진다.

 

The Great Gatsby.

그의 이름 앞 '위대한'이란 수식어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는 왜 위대했는가.

 

 

 

 

결코 희망적이지 않은 세상을 살기 위해서 사람들은 희망과 이상을 품고 살아야 한다. 아이러니하다.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하루를 견디고, 그렇게 될 거라는 이상을 꿈꾸며 또 하루를 버틴다.

그것마저 없다면 사람들의 삶은 절망적일 것이다.

 

개츠비에게 삶의 의미와 질서를 부여해주는 것은 바로 사랑하는 여인, 데이지를 얻기 위한 노력이었다.

상류사회 출신인 데이지는 아름다운 외모와 상냥한 성격을 가진 인기 많은 아가씨였지만, 개츠비는 태생도 재산과 명예도 보잘것없었다. 결국 데이지는 소문난 갑부이자 스포츠 선수 출신인 톰과 결혼하며 안정된 삶을 선택한다.

 

데이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개츠비는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수년간의 험한 세월을 보내고 어마어마한 갑부로 데이지와 재회하게 되기까지 그의 스토리는 과히 신화적이다.

그의 큰 성공에는 영리함, 성실한 태도, 열정 등이 있었지만, 밀수입 등 사기행각으로 엄청난 부를 얻게 된다.

 

개츠비는 위대한가 그렇지 않은가.

그가 은밀한 거래를 하지 않았다면 서슴없이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렇다면, 그는 대단한 부를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금수저로 태어나 엄청난 부를 누리는 톰과 데이지는 위대한가 그렇지 않은가.

데이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안에서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끝없는 매력, 그 딸랑거리는 소리, 그 심벌즈 같은 노랫소리........... 하얀 궁전 속 저 높은 곳에 공주님이, 그 황금의 아가씨가...........

 

영화 기생충에서 기우의 엄마가 했던 말이 계속 맴돈다.

 

"부잔데 착한 게 아니라, 부자니까 착한 거지." "솔직히, 이 돈이 나한테 다 있었어봐. 나는 더 착하지. 착해."

............ " 다리미야, 다리미. 돈이 다리미라고. 구김살을 좌~악 펴줘."

 

데이지의 인기 비결은 모나지 않은 성격과 특유의 따뜻함 그리고 아름다운 외모와 몸가짐이었다.

그녀가 끼니 걱정을 하는 집안의 딸이었다면 이 모든 것이 가능했을까? 

 

톰이 개츠비처럼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 홀로 삶을 개척하고 살았다면, 그의 무례하고 남을 깔보는 성격과 건장한 체격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을까? 그의 바람기는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데이지와 톰은 부와 화려함의 가면을 쓰고 그들의 결점을 감추고 있었다. 아니, 다른 사람들조차 그 가면에 현혹되어 그들의 본질을 알아보지 못했다.

 

톰과 데이지, 그들은 경솔한 인간이었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부숴버리고 난 뒤 돈이나 엄청난 무관심 또는 자기들을 한데 묶어 주는 것이 무엇이든 그 뒤로 물러나서는 자기들이 만들어 낸 쓰레기를 다른 사람들이 말끔히 치우도록 했던 것이다.

 

개츠비는 부가 가둬 보호해 주는 젊음과 신비, 그 많은 옷이 풍기는 신선함, 그리고 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데이지가 안전하고 자랑스럽게 은처럼 빛을 내뿜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이다.

 

 

 

 

개츠비는 삶의 가능성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과 희망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다. 스스로 이상을 만들고 창조적인 열정으로 그 환상을 부풀여 빛나게 했다. 그 거대한 환상의 힘이 그를 몰았다. 평범한 사람들이 아무리 희망을 품고 노력하며 살아간들 개츠비처럼 그 이상에 가까이 가진 못했을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다. 

 

만 건너 그녀 집 맞은편에 화려한 집을 얻고, 그녀 집 앞 부둣가에 밝게 빛나는 그린 라이트를 바라보며 얼마나 가슴이 벅차올랐을까. 밤마다 성대한 파티를 열어 그녀를 기다리며 얼마나 기대감에 부풀었을까.

그러나 개츠비의 낭만적 이상이었던 꿈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상실만이 남게 된다. 그의 젊은 시절은 잡을 수 없는 하나의 꿈에 바쳐진 채 스러져간다.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 무모한 개츠비다.

 

그 인간들은 썩어빠진 무리예요. 당신 한 사람이 그 빌어먹을 인간들을 모두 합쳐 놓은 것만큼이나 훌륭합니다.

 

이 책의 화자이자 개츠비의 유일한 친구였던 닉은 따스한 말 한마디를 건넨다. 이 말은 나에게도 그랬듯이, 개츠비에게도 조금의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완벽한 삶을 꿈꿨던 젊음의 열정과 대단한 도전은 해가 지나면서 서서히 뒤로 물러나다 여려지고 흐려지다 결국 사라진다.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에서 주인공들은 전철의 큰 창으로 지나치는 "오늘 당신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라는 한 교회 건물에 걸린 광고판을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피곤한 하루의 시작과 지친 하루의 끝에 바라보는 이 메시지는 과히 희망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현실에서 희망은 우리를 피해 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또 별로 문제 될 것은 없다. 그러니 또 좋은 일을 기대하고, Have a nice day! 를 외칠 수밖에.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다. 그것은 우리를 피해 갔지만 별로 문제 될 것은 없다.

 

 

 

 

이 책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서 있었던, 눈부신 경제 성장 그리고 그와 함께 독버섯처럼 자라난 도덕적 타락과 부패로 방황하던 시대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미국 동부 사람들은 부와 세련된 교양미를 갖추고 있지만 도덕적 윤리적으로 문란한 행동을 일삼았다. 반대로 중서부 사람들은 비록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할망정 도덕적 순수성과 청교도적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다.

전쟁 후, 돈과 쾌락을 좇아 동부로 이주했던 서부 사람들과 더 부유해진 동부 사람들의 혼란 속에 이 책의 비극은 놓여있다.

 

 

 

 

이제 나는 이 이야기가 결국 서부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감격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내 젊은 날의 귀행 열차, 서리가 내린 어두운 밤의 가로등과 썰매 종소리, 불 켜진 창문의 불빛에 크리스마스를 장식하는 할리 나무 화환의 그림자가 눈 위에 비치는 곳 말이다. 그곳이 바로 나의 중서부 지방이다.

 

닉은 개츠비의 죽음 후 중서부로 돌아온다.

 

껍데기만 남은 덧없는 순간, 잿빛으로 덮인 거리들, 부와 화려함 뒤에 숨은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무리들을 피해서 말이다. 

흔들리는 밤거리의 불빛들, 고급 옷으로 가득 찬 옷장, 넘쳐나는 음식들로 우리의 삶과 행복은 채워지지 않는다. 남들에게만 찾아가는 행운도 잡을 수 없는 그린 라이트다. 허황되고 의미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다정한 말과 따뜻한 눈길, 오후에 마시는 차 한잔, 여유로운 주말의 나른함, 알림 소리를 내며 뜨는 반가운 문자 메시지, 새로 바꾼 선풍기의 부드러운 바람, 맛있게 차려진 저녁 식사, 산책길에 만난 작은 꽃 한 송이가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이다.

 

 

오늘도 Have a nice day!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공원.

산이라기엔 험한 경사가 없고, 공원이라기엔 너무 높다.

 

이곳이 난지도 쓰레기 더미 위에 조성된 공원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이곳의 모든 식물, 동물, 곤충들이 인위적으로 조성된 공간에 적응하며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하늘공원을 향해 걸어 천천히 올라도 좋았겠지만, 조금 더워진 날씨에 체력 소비를 줄이기 위해 맹꽁이 전동차를 탔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건드리고 머리카락을 날렸다.

 

 

 

 

 

공원을 마주하는 순간 너른 평야 같은 느낌이 시원하고 신비로웠다. 여느 공원과는 확연히 다르다.

유채꽃은 스러지고, 해바라기는 아직이지만 푸릇한 청보리가 공원을 책임지고 있었다. 

 

 

 

 

 

곳곳에 전망대가 있어 한강과 서울의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강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강 위 선유도, 붉은 성산대교와 시원한 월드컵 대교가 나란히 보이고, 난지 한강공원의 여유로운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둥지'

예쁘고 조그만 둥지가 저마다 다른 각도로 배치되어 있다. 

이 작품은 같은 모양, 같은 크기의 아파트를 다른 시선으로 본 작품이다. 획일화된 공간에 갇혀 사는 현대인들이 다른 시각과 공간을 느끼며 자신만의 삶을 개척하라는 메시지가 좋았다. 새들도 다른 기울기의 공간에서 자신만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또 하나의 전망대 '하늘을 담은 그릇'

 

 

 

 


안으로 들어가니 하늘과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계단이 있고, 꼭대기에 오르니 하늘 공원의 사방을 조망할 수 있었다.

흐린 하늘이 아쉽긴 했지만, 무엇이든 또 그만의 매력은 존재한다.

 

 

 

 

 

월드컵 공원이 이렇게 다양한 공원들과 시설을 갖추고 있는 공간인 줄 몰랐다.

 

 

노을공원, 난지천공원의 모습도 궁금하지만, 쌀쌀한 가을 키 큰 억새의 흔들림과 지는 노을을 볼 수 있을 때 하늘과 가장 가까운 이곳을 먼저 찾을 것 같다.

 

 

 

 

 

 

주말이 현충일과 이어져 3일의 휴일이 주어졌다.

시간의 여유는 마음의 여유로 이어져 대학로에 가면 의례 하는 것들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었다.

 

 

 

 

코야코

 

 

오랜만에 온 즉석 떡볶이 집은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더 깔끔해진 듯도 했다. 치즈 떡볶이 2인분과 사리로 쫄면, 어묵을 주문서에 체크했다. 분위기 탓인지 추억의 맛처럼 느껴져 정말 맛있게 먹었다.

 

 

배를 채운 후, 마로니에 공원 근처 예술극장에서 사진을 찍고, 뭘 굳이 사지 않아도 늘 가는 Art Box와 10x10을 구경했다.

길거리에서는 연극 홍보를 하는 청년들이 "예매하셨어요?"라고 연신 물었고, 오늘은 당당히 "네"라고 말할 수 있었다.

 

 

 

 

 

모리커피 

 

 

공연 전 카페인이 필요했다. 마침 만난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과 장소의 모리 커피. 

뜨겁고 쌉쌀한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에너지를 충전했다.

 

 

 

 

 

 

해피 씨어터 소극장

 

 

연극을 보기 위해 소극장으로 향했다. 최근 대학로에 나올 때마다 눈길을 끌었던 그 연극, <라면>이다.

 

 

 

 

 

 

연극 무대

 

 

레트로 코믹극답게 보는 내내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배우들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웃음 세 컵, 추억 두 스푼, 눈물 한 꼬집! 누가 생각해 냈는지 정말 딱 그만큼이다.

최근 본 정통 연극과는 또 다른 매력이다. 

 

 

표를 사고, 입장을 하기 위해 늘어선 줄은 꽉 찬 좌석으로 이어지고, 그만큼 배우들이 힘을 받아 연기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학로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이벤트는 연극이다.

 

 

 

 

 

 

동숭동 커피

 

 

이름만으로도 낭만적인 동숭동 커피는 어느 해 연말, 자리가 없어 아쉬움을 간직했던 곳이다.

오늘 이곳은 여유로웠다.

 

 

 

 

 

 

커피 볶는 냄새보다 소리가 더 크게 감각을 자극했지만 듣기 좋았고, 불 밝힌 조명은 옛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조금 어수선한 듯 다양한 장식들로 치장된 카페는 레트로 감성과 모던한 느낌 모두 가지고 있는 모호한 매력의 공간이었다.

 

 

 

 

 

 

 

 

구석 예쁜 조명아래 자리를 잡았다. 달달한 라테 두 잔을 놓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일한 후 갖는 이 달콤한 휴식은 얼마나 좋은가.

내일 하루가 더 있다니 꿈만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소박하게 즐기는 하루하루는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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