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 정동진 독립 영화제를 다녀왔다.

내 기억 속 강릉은 에메랄드 빛 바다, 수제 맥주, 향긋한 커피의 낭만적인 장소다.

이 여름, 휴가여행으로 선택한 강릉 또한 잊지 못할 것이다.  별이 쏟아지는 여름밤, 대형 스크린에 떠오르는 영화들, 현장이 주었던 다정한 분위기가 꿈만 같다.

 

강릉 고래책방에서 구입한 뒤라스의 소설 <연인>.

마음에 두었던 책이었는데 마침 눈에 띄었고, 생각보다 두께가 얇아 놀랐다.

표지에는 영화 <연인>의 주연, 제인마치의 사진이 원서의 뒤라스 사진과 같은 분위기로 연출되어 있다.

 

 

 

마리그리트 뒤라스가 70대에 쓴 <연인>은 그녀의 자전적 소설이다.

1929년 프랑스령 베트남이 배경인 소설은, 전쟁과 식민지, 인종과 계급, 부와 가난 등이 뒤엉킨 상황 속에서, 뒤틀린 가족의 이야기 그리고 중국인 부호 아들과 가난한 프랑스 소녀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뒤라스의 자전적 소설이지만, 영속할 수 없는 기억 그리고 망각으로, 어느 부분이 미화이고 과장인지, 픽션인지 알 수 없지만, 삼십 대의 젊은 중국인과 열다섯  반  프랑스 소녀와의 사랑과 육체관계는 굉장히 파격적이다. 어린 소녀의 욕망과 대담함도 놀라울 따름이다. 

 

 

지금, 이 글에서는 그 젊은 날의 숨겨진 시기, 그 어떤 사실, 감정, 사건 들에 대해서, 그 묻혀 있던 것들을 캐내려 한다. 

 

 

 

소녀의 엄마

_ 삶에 대한 암담한 절망, 어머니는 날마다 그 절망에 시달리며 지냈다.

_ 나는 그에게 내 어린 시절 내내 어머니의 불행이 꿈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꿈은 바로 어머니였다.

_ 그녀는 신중하지 못했고, 주책스러웠고, 무책임했다. 어머니는 늘 그랬다. 어머니는 그저 살아가기만 했다. 

_어머니가 이따금씩 아주 행복해지는 시간, 온 집안을 대 청소하며 모든 것을 잊는 시간이었다. (....) 갑자기 호수, 강가의 들판, 개울, 해변처럼 변해 버린 이 집에서 우리도 행복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모두가,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한다.

_ 어떤 일에서도 끝까지 버텨 내는 기질 말이다. 그녀는 어떤 것도 그냥 내버려 두는 일이 없다. 사촌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고통이나 고역에 대해서마저도 포기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한다. 

 

 

 

큰 오빠

_ 내게 전쟁은 큰 오빠와도 같다. 전쟁은 큰오빠처럼 도처에 번지고, 침입하고, 훔치고, 또 감금한다. (....) 악은 바로 거기에, 우리 피부에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작은오빠

_ 내가 그에 대해 품고 있는 이 무모한 사랑은 나에게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비로 남아 있다. 왜 내가 따라 죽고 싶을 만큼이나 그를 사랑했는지, 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 내가 이 사랑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은 지 10년이 지났고, 그래서 그에 대해 거의 생각하고 있지 않을 무렵이었다. 나는 영원히 그를 사랑할 것 같았고, 이 사랑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죽음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_ 내 작은 오빠는 불멸이었다.

 

 

 

가족

_ 우리 가족이 서로에게 품었던 사랑, 또 끔찍한 증오, 파산과 죽음이 뒤엉킨 우리 가족 공동의 이야기.

_ 늘 무리 속에서 고립된 존재들로 있는 그들.

_ 대화라는 단어는 허영이다. 이 집에 가장 잘 어울리는 어휘는 수치와 자만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가족은 삶을 살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근원적인 수치심 속에 빠져있다. 우리 형제들의 이야기 가장 깊숙한 곳에는 우리 세 사람이 사회가 목 졸라 죽인 우리 어머니, 그 선량한 여인의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우리는 어머니를 절망에 빠뜨려 버린 이 사회의 한편에 비켜서 있다. 그토록 다정하고, 그토록 남을 쉽게 믿는 우리 어머니에게 사람들이 저지른 짓들 때문에, 우리는 삶을 증오하고, 우리 자신을 증오하고 있다.

 

 

 

연인

_ 처음부터 우리는 두 사람이 공유하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미래에 대해서는 결코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_ 두려움을 넘어 사랑할 힘이 없기 때문에 그는 곧잘 운다. 그의 영웅심. 그것은 바로 나이고, 그의 노예 근성, 그것은 그의 아버지의 재산이다.

_ 그녀를 향한 자신에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해도 그녀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것은 그 자신도 아직 잘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는 그 사랑을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_ 그렇게 나는 그의 아기가 되었다. 그도 역시 나에게는 또 다른 무엇이 되었다.

 

 

 

그녀의 연인은 그의 아버지 뜻대로 중국인 부호 딸과 결혼하고, 소녀는 프랑스로 떠나기 위해 배를 탄다. 떠나는 배에서 그녀는 육지를 바라보다, 그의 길고 검은 차, 그리고 하얀 양복을 입은 실루엣을 발견한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도 그를 보았다.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은 그렇게 끝이 난다. 

 

대양을 횡단하던 어느 밤, 배의 중앙 갑판 응접실에서 쇼팽의 왈츠가 울려퍼진 순간, 끝난 줄 알았던 사랑이 아프고 슬프게 살아난다.

 

그리고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콜랑의 그 남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불현듯 예전에 자신이 콜랑의 남자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런 종류의 사랑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제 그는 모래 속에 스며든 물처럼 이야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이제야, 쇼팽의 음악이 큰 소리로 퍼지는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겨우 다시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작은 오빠가 죽은 후에야 그의 불멸을 기억해 냈듯이.

 

불멸성은, 결코, 불멸성으로 눈에 띄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절대적인 이원성이다. 그것은 세부적인 것에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근원 속에서만 존재한다. 어떤 사람들은 불멸성의 존재를 품을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하는 줄을 모르고 있다는 조건에서이다. 마찬가지로,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내면에서 그 불멸성의 존재를 간파해 낼 수 있는데, 그것도 똑같은 조건에서, 즉 그들이 그럴 능력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서이다. 이런 불멸성이 살아 있을 때에만, 삶은 불멸의 것이 된다.

불멸성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소녀는 콜랑의 그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무모한 용기라도 내어 그녀를 선택해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전쟁은 끝나고 몇 해가 흐르고, 몇 번의 결혼과 몇 번의 이혼에서 아이들을 낳고, 책을 쓰는 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파리에 방문한 콜랑의 남자는 그녀에게 전화를 한다.

 

그의 사랑은 예전과 똑같다고. 그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결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죽는 순간까지 그녀만을 사랑할 거라고.

 

 

 

소설의 아름다운 표현들이 인상적이었다.

서로에게 고통의 씨앗이 되는 가족, 욕망과 사랑, 불멸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 준 책이다.

책을 본 후 다시 영화를 보니,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책을 먼저 읽는 것을 추천한다.

 

 

 

 

 

 

 

 

 

 

 

 

2023년 7월 11일 밀란 쿤데라가 세상을 떠났다.

 

괴테나 베토벤, 헤밍웨이, 셰익스피어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책이나 예술 작품에서 만났을 때 묘한 동경심 같은 것이 있었다.  '내'가 '밀란 쿤데라'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것이 이상하리만큼 비현실적이다.

 

1929년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난 그는, 1948년 체코 공산당에 입당했으나 1950년 당에 반하는 활동으로 추방당하고, 1956년 다시 입당 승인되었으나 1970년 다시 추방당한다. 스탈린의 정치에 회의를 느낀 그는 반 공산주의자로 활동을 하게 되며 1968년 프라하의 봄에 참여한다. 이후, 저서가 압수되고 탄압을 받으며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한다.

그의 작품들에는 시대와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우스꽝스럽게 혹은 진지하게 그려진다.

 

<우스운 사랑>은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투영하기에 어느 것보다 애착이 가는 작품"이라고 애정을 보인 초기 연작집이다.

 

 

 

 

사랑 하나.아무도 웃지 않으리

 

가벼운 농담으로 시작된 한 개인의 파멸이 전체주의의 무거움 속에서 약간은 우스꽝스럽게 그려지고 있다.

나의 거짓말은- 당신이 그렇게 부르고 싶다면 - 바로 내 본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야. 그러한 거짓말을 내가 하는 척하는 게 아냐. 그러한 거짓말 속에서 나는 실제로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거지. 그렇지만 이 세상에는 내가 통찰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일들이 있지. 내가 사랑하고 진지하게 여기는 일들이 있단 말이야.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나는 농담으로 대하지 않아. 그런 것들을 두고 내가 거짓말을 하면, 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거든.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건 당신도 내게 요구할 수 없어. 그런 일은 절대 하지 않을 테니까.

 

 

 

사랑 둘. 영원한 그리움의 황금 사과

 

글자 그대로 우리가 무언가를 믿게 되면, 우리는 그 믿음 때문에 끝내는 불합리성에 도달하게 되지. 어떤 특정한 정책의 진정한 신봉자라면 그 정책의 궤변이 아니라, 그 궤변 뒤에 숨어 있는 실제적인 목표에 주목하지. 정치적인 구호와 궤변은 결국은 우리더러 믿으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야. 오히려 그것들은 공동의 협의된 구실로 이용되는 거야. 그것들을 말 그대로 믿는 바보들은 조만간 그것들의 모순을 발견하고, 봉기를 꾀하기 시작하다가 마침내는 굴욕적으로 이단자나 배신자로 종말을 고하게 되는 거야. 아니, 지나친 믿음은 결코 좋은 결실을 가져다주지 않아. 이것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체제에 해당하는 말일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가씨를 정복하려고 할 때의 예의 그 체제에서도 해당되는 내용이야.

 

결코 손에 잡히지 않는 그린 라이트,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동경, 영원한 그리움의 황금사과!

 

 

 

사랑 셋. 히치하이킹 놀이

 

육체와 영혼을 결코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는 그녀, 사랑하는 사람과 거짓하나 없기를 바라는 진지한 그녀.

그녀는 우울한 질투심으로 히치하이킹 놀이를 시작한다. 

무책임한 놀이 속에서 뻔뻔하고, 자유분방하며 가벼워질 수 있었다. 놀이가 극단적이 될수록 그들은 서로의 경계를 넘게 된다. 장난으로 시작한 놀이가 원래의 삶을 공격한다.

 

그는 그녀의 개성을 특징 지워 주었던 윤곽은 단지 허상에 불과하며, 그러한 허상을 바라보다 희생된 상대가 바로 그 자신임을 깨달았다. 실제로 그가 사랑했던 그 아가씨는 그의 동경과 유추와, 신뢰의 산물에 불과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서야 비로소 그의 여자친구의 진정한 모습이 그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 절망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절망적으로 낯설게, 절망적으로 모호한 모습으로. 그는 그녀를 증오했다.

 

모든 놀이가 끝난 후 "나는 나야, 나는 나야.............. " 하고 흐느끼는 그녀를 향해 청년은 생각한다.

다만 미지의 크기가 또 함께 들어 있을 그녀의 맹세의 슬픈 무의미만을_____________.

 

마약에 취하듯 놀이에 취해 정 반대의 모습을 연기했던 그녀를 오해하며 그들은 멀어진다.

오해일까? 진실일까? 우리의 내면에는 수많은 다른 '나'가 존재한다. 

카멜레온 같은 나, 감정을 내면에 묻은 채 표현하지 않는 나,  모든 다른 나임에도 '나는 나'라고 흐느끼는 우리는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이다.

 

 

 

사랑 넷. 사랑의 심포지엄

 

블투명하고, 우스꽝스럽고, 즉흥적이고 무심한 사람들, 사랑들.......

 

 

 

사랑 다섯. 늙은 주검은 젊은 주검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남자의 가슴속 기념비와 여자의 외부에 서 있는 기념비.

영원하지 못할 그 순간. 그때는 그때일 뿐.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 

늙은 주검은 젊은 주검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사랑 여섯. 20년 후의 하벨 박사

 

그토록 에로틱한 명성을 얻었던 하벨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더 이상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순종적이 되었고 외롭고 서글픈 감정을 느낀다.

그의 아내인 유명한 여배우는 하벨이 그녀를 버리고 떠날까 봐 시기심에 늘 불안하다.

반면 하벨은 그녀의 유명세 덕에 매력 없어진 자신의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었다.

 

파트너의 외모, 지위, 인격 등에 영향을 받는 나. 

사랑의 현재성

사랑이라는 착각

육체적인 쾌락

말의 수집

우스운 사랑

 

 

 

사랑 일곱. 에두아르트와 신


신을 믿지 않는 에두아르트가 신을 믿는 알리스를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한 후 겪는 곤란함과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

형이 그 미친 사람한테 순수한 진실만을, 형이 그 사람을 보고 느낀 것만을 이야기한다면, 형은 결국 미친 사람과 진지한 대화를 하는 꼴이 되고 말고, 결국에는 형도 미칠 거예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도 다 마찬가지예요. 내가 그녀의 면전에 대고 옹고집쟁이처럼 진실을 말했다면, 그건 내가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꼴이 되고 마는 거예요. 그러나 그처럼 진지하지 않은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스스로 진지하지 않게 되는 걸 뜻하지요. 형, 나는 이 모든 미치광이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또 그들 중의 하나가 되지 않으려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어요.

 

알리스와 나눈 사랑의 이야기는 어떤 진지함이나 의미도 없이 우연과 착각으로 짜여진 무가치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그에게 분명해졌다.

 

이 세상의 누구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의 인생은 슬플 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에두아르트는 신을 동경한다. 왜냐하면 신만이 모든 정신분산적인 의무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은 단순하게 존재할 수 있고, 그리고 신만이 (단독자, 유일자, 비존재자로서) 이 비본질적인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존재적인) 세계에 대응할 본질적인 반대세력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사진 속 책은 절판되고, 지금은 <우스운 사랑들>이란 제목으로 바뀌었다.

 

밀란 쿤데라의 입문서라 할 정도로 다른 작품들의 모티브가 되어 보이는 내용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영혼과 육체, 가벼움과 무거움, 농담과 진지함, 인간의 실존에 대한 고뇌의 일관성을 우스꽝스러운 사랑의 에피소드 안에서 우습지만 또 마냥 가볍지 않은 톤으로 그리고 있다.

 

농담(1967)

사랑(1968)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

불멸 (1990)

정체성(1998) 

무의미의 축제(2014)

 

내가 접한 밀란 쿤데라의 책들이다. 

출판된 시기 순으로 다시 읽어보려 한다. 그의 다른 책들도 사이사이에 넣어 볼 생각이다.

 

 

 

 

 

 

 

 

 
 
 
 
독일 배우 마티나 게덱을 보고 싶어 찾아본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제목이 주는 느낌대로 너무 좋았다.
영화를 보고 책을 구입했다. 1/3 정도 읽고,  거의 600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 눌려 잠시 두었던 책.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해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들여 완독했다.
 
 
 
스위스 베른에 사는 언어학자이자 교사 그레고리우스(제레미 아이언스)는 출근길에 키르헨펠트 다리에서 자살하려고 하던 포르투갈 여성을 돕게 된다.  그녀의 수수께끼 같은 행동, 낯설지만 부드럽고 동화 같은 억양의 포루투칼어, 여성의 코트 주머니에서 발견한 책 <언어의 연금술사>, 그리고 리스본행 열차 티켓....... 이 모든 우연으로 그는 리스본행 열차에 몸을 싣게 된다.
 
그레고리우스는 하루아침에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그냥' 떠나는 것을 감행했다. 그게 과연 가능한가? 그 누구도 아닌 문두스(세계, 우주)라고 불리었던 철저하게 완벽했던 한 인간이? 인생의 57년이 지난 시점에서 말이다.
그는 낯선 리스본에서 <언어의 연금술사>의 저자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과거 흔적을 찾는 여정을 떠난다.
천재였으며, 열정적이었고, 살리자르 독재정권에서 의사로, 레지스탕스로 살았으며 시와 사유를 사랑했던 그의 인생에 깊이 빠져들며, 더불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많은 경험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의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된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잔인함과 자비심과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으로 가득한 감독

 
'스스로의 고고학자'가 되어 숨어있는 나를 파헤치고 발견해 나간다면, 다른 내가 될 수 있을까?
더 이상 원하지 않는 무언가를 그냥 떠나 새로운 경험과 맞닥뜨리면, 나의 삶은 만족스럽게 혹은 진실하게 흘러가는 것일까?
 
나의 의식 표면 아래 숨어있던 무언가가 떨어져 나와 돌연한 떠남을 강행했을 때, 그때 만약, 나를 예기치 않은 곳으로 이끌고, 실망시키고, 실패를 경험하게 하고, 파멸의 길로 이끈다면? 
우리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현 상태에 머물기를 흔쾌히 수락한다.
그러나 이는 떠나고 싶다는 반증일 것이다.
 
 
 
실망에 대한 아마데우의 글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실망이라는 향유

실망은 불행이라고 간주되지만, 이는 분별없는 선입견일 뿐이다. 실망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원하는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으랴? 또한 이런 발견 없이 자기 인식의 근본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그러니 실망이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함을 어떻게 얻을 수 있으랴?
.......

우린 실망을 찾고 추적하며 수집해야 한다.
.......

자신에 대해 정말 잘 알고 싶은 사람은, 쉬지 말고 광신적으로 실망을 수집해야 한다. 실망스러운 경험의 수집이란 그에게 중독과도 같을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중독. 그에게는 실망이 뜨겁게 파괴하는 독이 아니라 서늘하게 긴장을 풀어주는 향유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의 진정한 윤곽이 무엇인지 눈을 뜨게 해주는 향유.

 
 
 
영화의 엔딩은, 강렬했던 리스본에서의 며칠을 보낸 그레고리우스가 베른으로 떠나는 기차역을 배경으로 한다.
리스본에서 만난 여의사 마리아나 에사(마리아나 게덱)와 작별 인사를 하던 중, 그는 아마데우와 그 주변 인물들의 활력 있고 강렬했던 삶을 생각하며 "Where is my life?"라고 하며 살아온 인생을 후회한다.
그럼에도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그에게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Why don't you just stay?"
 
책의 마지막은, 베른으로 돌아온 그레고리우스가 심해진 현기증에 대한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으로 들어가며 끝을 맺는다. 
 
엔딩은 다르지만, 이전과는 다른 경험의 조각을 품고 베른으로 돌아간 그레고리우스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조금은 더 활력 있게, 지루하지 않게, 강렬하게, 충만하게 말이다.
어떤 실망과 실패가 있을지라도_______.
 
책과 영화는 다른 부분들이 꽤나 있다. 영화에는 아마데우의 둘째 여동생도, 그레고리우스의 친구 독시아데스도 등장하지 않는다. 책의 무수한 말과 사유들을 표현하기에 영화는 짧다. 그렇지만 책의 묵직하고 감동적인 부분들을 영화가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화면에서 주인공들의 이미지를  만나고, 리스본의 거리와 스페인 땅 끝 배경을 보는 재미는 더없이 감동적이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책 속의 책 <언어의 연금술사>가 실제 존재하는 책인지 검색해 보았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이 책이 존재한다면 꼭 갖고 싶다. 가능하면 필사해서 나만의 책을 소장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
TV에서 스치며 봤던, 야경이 아름다웠던 포르투갈의 항구도시 리스본은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저장해 두었다.
 
 
 
 
 
 
 
 

 

 

 

 

 

 

전혀 가늠할 수 없었던 부모의 삶.

그들의 이면에 눈을 돌리거나,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문턱, 죽음, 그리고 사후의 시간들인 것 같다.

김정현의 <아버지>,  정진영의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두 소설을 생각했다.

 

 

 

아버지의 해방

 

빨치산이었던 '나'(고아리)의 아버지 '고상욱'은 이십 년 가까운 감옥살이를 마친 후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 살아간다.

늙은 혁명가는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면서도, 쇠심줄 보다 질긴 고집으로 '사회주의'니 '민중'이니를 논하며 호기롭다.

현실로 닿을 수 없었던 그의 사상, 연좌제로 고통받은 가족들, 자신을 향한 원망의 목소리를 감내하며 외롭게 살아갔던 아버지. 그렇게 허울뿐인 듯했던 혁명가의 삶이 끝났다.

 

사회주의자 아닌 아버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나는 아버지를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장례식장에 찾아온 기이하고 오랜 인연의 조문객들로 인해 내가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인간적인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자식이자 형제였고, 남자이자 연인이었으며, 친구와 이웃이었고, 한 여자의 남편이었고 나의 아버지였던 그를 말이다. 

 

아버지는 갔어도 어떤 순간의 아버지는 누군가의 시간 속에 각인되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다. 나의 시간 속에 존재할 숱한 순간의 아버지가 문득 그리워졌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영정 속 아버지가, 이틀 내 봤던, 아까도 봤던 영정 속 아버지가 전과 달리 그립던 어떤 날들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빨치산의 딸이란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평생 발버둥 쳤던 '나'는 아버지의 진심을,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그가 떠난 것이 사무치게 슬퍼 울음을 터트린다. 고작 사 년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의 경력은 이 땅에서 아버지의 평생을 옥죄었다. 

세상은 평등하지 않다. 결코 인간적이지 않다. 삶은 인간에게 너무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아버지의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 둘이 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나를 감쌌다.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해방일지

 

결국 아버지는 죽음으로 인생의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나'에게 그의 삶을 부활시켜 연민과 사랑과 화해와 용서의 기회를 주었다.

나는 결국, 빨치산의 딸이란 수렁에서,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과 미움에서 해방되어 아름다운 한 인간, 나의 아버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죽음이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아버지는 보통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해방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크지 않을까, 다시는 눈 뜰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삶과 죽음. 무엇이 속박이며 무엇이 해방일까.

한 사람의 삶의 무게를 결코 알 수 없다. 그 수많은 속박과 고통, 고독 그 삶의 무게를.

 

최애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주인공들은 제목과 다르게 결국 온전한 해방을 맞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루하루, 하루 몇 초씩이라도 나의 고통스러운 삶의 해방을 위해 애를 쓰며 힘겹게 힘겹게 하루를 몰고 간다. 그렇게 때로는 찬란한 순간이 있음으로 영원의 해방은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나'의 아버지 고상욱의 삶 한가운데에도 그런 순간과 해방이,

보고 싶은 내 아버지의 삶에도 싱그러웠던 청춘과 맘 가득 품었던 해방일지들이 존재했음을 생각하니 마음이 벅차고 눈시울이 뜨끈해진다. 

 

 

 

 

 

 

 

 

 

 

 

 

 

나는 독일인입니다._전쟁과 역사와 죄의식에 관하여

 

평산 책방에서 산 몇 가지의 책들 중 하나이다.

동화책 같은 그림을 가지고 있는 따뜻한 표지에 쓸쓸함과 외로움이 묻어난다.

부제를 보고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게 된다.

 

 

 

독일어를 전공한 나로서는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은 나라 1위.

독일에 사시는 이모가 어쩌다  한국에 오실 때 가져다 주신 독일제 압력밥솥, 칼과 가위, 믹서기, 얼룩제거 비누 등을 감탄하면서 썼다. '독일은 물건도 잘 만드는구나' 하며.....

 

그러나 독일의 역사는 치욕스럽다. 씻을 수 없는 원죄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미국 이민자인 작가 노라 크루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에 전쟁의 주체였던 독일인으로서 죄의식을 가지며 살아간다. 독일어 억양을 감추고, 유대인을 보면 죄책감이 들고, 독일에 대한 비난들을 들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간다. 

 

그러나 그녀는 폐허를 마주 볼 용기를 내본다. 고향과 가족의 과거를 파헤치며, 두렵지만 현실을 마주하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과거를 덮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고 직시하고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만이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길임을 절감하면서......

 

홀로코스트 관련 영화 <사라의 열쇠>에서, 미국인 기자 줄리아는 1942년 프랑스 유대인 집단 체포사건을 조사하게 되고 프랑스인인 남편 가족과 얽혀있는 그 사건을 파헤치면서 끔찍했던 그날의 흔적들과 피해자 가족이 현재까지 겪고 있는 트라우마를 마주하게 된다. 불편한 과거를 알아가는 여정이 이 책과 닮아있다. 프랑스인들도 그런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영화이다.

 

 

 

작가는 독일의 좋은 것들 No.1~No.8까지 소개하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또한 감추지 않는다.

절대 떨어지지 않는 반창고 한자플라스트(Hansaplast), 평온한 숲(Der Wald), 버섯 따기(Das Pilze-sammeln), 유명한 라이츠 바인더(Der Leitz Aktenordner), 보온 물주머니 탕파(Die Warmflasche) , 수 천 종류의 빵 (Das Brot), 소 쓸개로 만든 비누 갈자이페(Die Gallseife), 강력한 우후 접착제(Der Uhu).

 

그렇다. 효과 좋은 제품들 뿐 아니라, 독일은 괴테와 실러의 나라, 수많은 문학작품들을 보유한 나라, 시원한 맥주와 맛있는 소시지를 맛볼 수 있는 나라이다. 

 

 

 

"죄의식 가지지 말아요" (유대인) 월터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한다. 그 말로 그는, 과거 그의 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에게 해주었던 것과 똑같은 일을 한다. 그는 나를 위한 증언서에 서명한다.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개인의 속죄가 수백만 명의 고통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 따뜻한 목소리와 관대함 덕분에 나는 어느새 친밀감을 느낀다.

 

식민시대와 냉전시대.

과거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생각해 본다.

 

노라 크루크의 이 책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감동적인 책이다.

 

 

 

 

 

 

 

 

 

 

두 권을 내리읽었다.

 

소를 그린 유명한 작가로만 알고 있던 이중섭.

아름다운 사람....... 사람이란 단어에 마음이 요동친다.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많은 유명인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의 훌륭한 재능과 업적은 개인의 인성과 삶의 태도 그리고 실천하는 삶 등으로 완성된다.

아무리 잘나도 사람됨이 없고 개념 없이 행동한다면 그들의 성과는 하찮게 보인다.

 

 

 

두 권의 책과 몇 개의 방송을 찾아보며 이중섭의 삶을 엿본다.

전쟁, 지독한 가난으로 어머니 그리고 아내와 두 아들과 이별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인 비극.

그림 그리는 것을 너무도 사랑했고 탁월한 재능이 있었지만, 맘껏 후원해 줄 귀인을 만나지 못했던 비운.

 

그림을 팔아 빚을 갚고, 일본에 있는 가족을 만나 오순도순 살며, 예술가로서 인생을 살고 싶었던 그의 정당한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떤 재능과 신념과 성실함과 선함과 사랑도 그를 구원해주지 못했다.

 

마음이 여리고 순수하며, 솔직하고 한결같았던 사람.

일본인 아내 마사코를 귀애하는 절절한 사랑.

하늘나라로 간 첫째 아들, 그리고 두 아들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사랑.

예술에 대한 열정에 타협이라고는 없었던 사람.

 

책에 실린 그의 그림들은 솔직하다. 사연이 실린 글 같다.

소의 표정과 몸짓, 동그랗게 연결되어 있는 아이들, 정겨운 꽃게와 물고기 그림들, 하나 되어 접촉하고 있는 가족, 유작이 돼버린 작품 <돌아오지 않는 강>의 어두운 외로움과 고독.

 

일본에 있는 아내와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애가 타고 속이 상한다. 

그리움과 사랑으로 견디고, 희망으로 버틴 그의 삶이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어떤 것들 _엘런 긴즈버그

한때 네가 사랑했던 어떤 것들은
영원히 너의 것이 된다.
네가 그것을 떠나보낸다 해도
그것들은 원을 그리며 너에게 돌아온다.
그것들은 너 자신의 일부가 된다.

 

미국의 시인 긴즈버그의 시다.

비트세대를 다룬 영화  <Kill Your Darlings>에서 긴즈버그 역할로 나온 다니엘 래드 클리프의 대사에서는

마지막 부분에 Or they destroy you. 가 포함된다.

 

한때 네가 사랑했던 어떤 것들은 
영원히 너의 것이 된다.
네가 그것을 떠나보낸다 해도
그것들은 원을 그리며 너에게 돌아온다.
그것들은 너 자신의 일부가 된다.

아니면 너를 파괴한다.

 

 

 

이중섭이 사랑했던 어떤 것들.

그것들을 떠나보낼 수도, 헤어 나올 수도 없었던 그 자신의 일부.

아름답기도 슬프기도 한 비극.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의 희망과 기쁨, 슬픔과 고독이 나에게 전해진다.

그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제주 서귀포에 가면 그의 제주시절 거주지와 미술관이 있다. 거주지는 아주 오래전 가 보았지만 거의 기억나질 않는다.

제주의 바람을 맞으며 돌담길 따라 이중섭 길과 미술관도 가보고 싶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부모에겐 자랑거리였고, 능력 있는 항소법원 판사로 동료들에게 사랑받았고, 크고 작은 다툼이 있었지만 가정의 평화를 깨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이반 일리치.

그의 죽음을 마주하며 동료들은 자리 이동이나 승진을 생각하고, 아내는 재산과 연금문제로 혈안이 되어있다.

자신들은 죽음과는 멀리 있다는 듯, 한 사람의 죽음이 다른 이들에게는 감정의 동요도, 연민도, 삶을 성찰하는 기회도 주지 못한다. 그저 번거로운 일이 생겼을 뿐.

 

반면, 이반 일리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치병으로 통증이 시작된 후,  삶과 죽음,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며,  희망의 사다리를 오르락거리다 절망의 늪으로 추락하며 절절한 외로움과 고독을 홀로 감내한다.

 

 

 

[정면으로 다가오는 죽음]

 

이반 일리치는 정신을 가다듬고 어떻게든 통증에 대한 생각 자체를 떨쳐내려고 했지만 통증은 결코 떠나지 않았다. 죽음은 전혀 비켜나지 않고 정면으로 버티고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욱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죽음이란 놈이 다른 어떤 일도 하지 못하도록 자꾸만 그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저 죽음만을 바라보도록, 피하지 않고 똑바로 죽음을 응시하도록, 모든 일을 손에서 내려놓고 그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만 했다.

 

죽음은 그 어떤 것이라도 뚫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시 죽음이 꽃나무 뒤편에서 또렷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서재로 돌아가 자리에 누워 다시 혼자 죽음과 대면해야 했다. 죽음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죽음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젖어들 뿐이었다.

 

 

 

[외로움과 고독]

 

오랜 기간 병마에 시달리던 중 어떤 때에는, 사실대로 고백하기 좀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이반 일리치는 누군가 자신을 어린아이 대하듯이 그렇게 가엾게 여기며 보살펴주기를 가장 간절히 소원했다. 어린애를 어루만지고 달래듯이 다정하게 쓰다듬어주고 입을 맞추고 자기를 위해 울어주기를 그는 바랐다.

 

뾰뜨르가 방을 나가고 혼자 남은 이반 일리치는 계속 끙끙 앓았다. 그건 꼭 통증 때문만이 아니라 혼자라는 끔찍한 외로움의 절절한 표현이었다.

 

늘 모든 게 이런 식이었다. 희망이 한 방울 반짝이는가 싶다가도 이내 절망의 파도에 묻혀버리고 이어지는 통증과 통증, 괴로움과 괴로움, 모든 게 그대로였다. 

 

희망을 북돋아주는 의사의 말에 한결 고양되었던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여전히 똑같은 그림들, 커튼과 벽지, 조그만 약병들, 그리고 여전히 고통에 괴로운 육신, 이반 일리치는 다시 끙끙 앓기 시작했다. 주사가 처방되었고 그는 의식을 잃었다.

 

그는 다리를 내려놓고 팔을 베고 옆으로 누웠다. 자신이 너무나 불쌍했다. 그는 게라심이 옆방으로 물러나기를 기다렸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어린애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한없는 무력감과 끔찍한 고독이, 사람들과 하느님의 냉혹함이, 그리고 하느님의 부재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과거의 추억과 후회]

 

어린 시절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리고 현재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기뻤던 일들은 더욱더 덧없고 의심스러운 것으로 변했다......... 그렇게 세월이 더 지날수록 좋았던 기억은 점점 더 사라져 갔다.

 

'갈수록 고통이 심해지듯이 내 삶의 모든 것은 더욱더 나빠져만 갔군.' 멀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그곳, 인생의 초기에는 환한 빛이 한 줄기 반짝이고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빛은 광채를 잃고 어두워져만 갔다. 그나마 그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결혼...... 너무나 절망적이고 환멸뿐이었다. 아내의 입 냄새, 애욕과 위선! 그리고 죽은 것만 같은 공직 생활과 돈 걱정들, 그렇게 일 년이 가고 이년이 가고 십 년이 가고 이십 년이 갔다. 언제나 똑같은 생활이었다. 하루를 살면 하루 더 죽어가는 그런 삶이었다. 한 걸음씩 산을 오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한 걸음씩 산을 내려가고 있었던 거야. 세상 사람들은 내가 산을 오른다고 보았지만 내 발밑에서는 서서히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었던 거야...... 그래 결국 이렇게 됐지. 죽는 일만 남은 것이다!

 

 

 

[삶과 죽음의 성찰]

 

그런데 왜? 왜 이렇게 된 것이지? 그럴 리가 없다. 삶이 이렇게 무의미하고 역겨운 것일 수는 없는 것이다. 삶이 그렇게 무의미하고 역겨운 것이라면 왜 이렇게 죽어야 하고 죽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해야 한단 말이냐? 아니다, 뭔가 그게 아니다.  '어쩌면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찾아들었다. '난 정해진 대로 그대로 다 했는데 어떻게 잘못될 수가 있단 말인가?'

 

그의 정신적 고통은 전날 밤, 광대뼈가 불거진, 게라심의 졸음 가득한 선량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떠오른, 만약에 정말로 내가 살아온 모든 삶이, 내 생각과 행동이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런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지? 하는 의심이 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망쳐놓았다는 생각만 가지고, 그걸 바로잡을 기회도 없이 인생에서 사라져 버린다면, 그럼 어떻게 하지?'  그는 똑바로 누워 완전히 새로운 시각에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날 아침 시종과 아내, 그리고 딸과 의사를 차례로 만나게 되었을 때 그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날 밤 깨달은 끔찍한 진실을 그에게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그는 그들에게서 바로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삶의 방식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죽어가던 이반 일리치는 구멍 속으로 굴러 떨어졌고 빛을 보았다. 동시에 그는 그의 삶이 모두 제대로 된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아직은 그걸 바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문했다. '그게' 뭐지? 그리고 조용히 귀를 기울이다가 입을 다물었다. 바로 그때 누군가 그의 손을 잡고 입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눈을 뜨고 아들을 보았다. 아들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아내도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입을 크게 벌린 채 코와 빰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내도 불쌍했다. '그래 내가 모두를 괴롭히고 있구나'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모두 참 안 됐어. 하지만 내가 죽으면 훨씬 나을 거야.'

 

 

 

[죽음과 평화]

 

그는 아내에게 눈으로 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데리고 나가....... 불쌍해 당신도......." 
그는 '쁘로스찌'(용서해 줘)라고 한마디 더 덧붙이고 싶었지만 '쁘로뿌스찌'(보내줘)라고 말하고 말았다. 

 

그러자 돌연 모든 것이 환해지며 지금까지 그를 괴롭히며 마음속에 갇혀 있던 것이 일순간 밖으로, 두 방향으로, 열 방행으로, 온갖 방향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가족들이 모두 안쓰럽게 여겨지고 모두의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다. 이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신도 벗어나고 가족들도 다 벗어나게 해주어야 했다. 

 

'아, 이렇게 기쁠 수가!'
이 모든 것은 한순간의 일이었고 이 한순간의 의미는 이제 흔들리지 않았다.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더 이상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 그는 숨을 길게 들이마시다가 그대로 멈추고 온몸을 쭉 뻗고 숨을 거두었다.

 

 

 

 

 

이 책을 읽으며 소설 <아버지(김정현)>를 생각했다.

췌장암으로 죽어가는 한 아버지의 절절한 외로움과 고독이 너무 마음 아팠던 책. 작년 2월 친정아빠가 떠난 후 그가 그리워 읽었던 책이다. 두 책 주인공 성격은 다르지만, 한 가정의 가장, 한 인간이 느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삶에 대한 후회와 남아있는 자들에 대한 연민들이 닿아있다.

 

영화 <The Last Word,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의 주인공 해리엇처럼 이반 일리치에게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가족과 화해하며, 오만과 욕심으로 잊고 살았던 작지만 가슴 따뜻한 일들을 하고, 사랑으로 인생을 마무리할 시간이 주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영화의 마지막에서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한 모습을 바라보며, 붉은빛의 스카프를 어깨에 두른 채, 음악의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며, 잠을 자듯 떠난 그녀의 죽음 앞에서 난 눈시울이 붉어졌다. 죽음의 춤을 추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 우아해 보였기 때문일까?

 

이반 일리치가 죽음의 순간 느꼈던 깨달음, 아들의 사랑, 가족들에 대한 연민은 삶의 노고에 대한 보상치고 지독히도 가혹하게 찰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인물의 감정을 놀랍도록 세밀하고 날카롭게 표현하는 톨스토이의 작품들은 그래서인지 더 가슴에 와닿는다.

책 <아버지>와 셜리 맥클레인 주연 영화를 다시 챙겨봐야겠다.

 

 

 

 

 

 

 

 

 

 

 

그(자크 레니에)는 테라스로 나와 다시 고독에 잠겼다.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에서, 쿠바에서 전투를 치른 다음 페루 해변으로 몸을 피한 마흔일곱의 남자.

세상에 대해 알만큼 알았고, 삶에 대해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그는, 세상 끝 해변에서 홀로 카페를 운영한다.

 

자연은 사람을 배신하는 일이 거의 없으므로, 다만 아름다운 자연에서 위안을 구할 뿐.

 

이 해변의 모래 위에는 죽어있는 수많은 새들과, 죽음을 기다리며 퍼득거리는 새들로 가득하다.

새들이 왜 먼바다의 섬들을 떠나 라마에서 북쪽으로 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이 해변에 와서 죽는지 아무도 그에게 설명해주지 못했다. 
새들에게는 이곳이 믿는 이들이 영혼을 반환하러 간다는 인도의 성지 바라나시 같은 곳일 수도 있었다.

 

자크는 세상을 피해 살고자, 새들은 먼바다의 섬을 떠나 죽고자 이 해변을 찾는다.

어쨌든..... 한 가지 설명은 있을 것이다.

 

 

 

 

 

그는 사연을 알 순 없지만 바다에 빠져 죽으려던 한 여인을 발견하고 구해준다. 그리고 작고 여린 그녀로 인해  잠시 행복의 가능성을 느낀다.

 

그녀가 흐느꼈다. 그가 대책 없는 어리석음이라고 스스로 이름 붙인 그 무엇에 다시 점령당하고 만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고, 자신의 손 안에서 모든 것이 부서지는 걸 목격하는 일에 습관이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이런 식이었으므로 속수무책이었다. 그의 내부에 무언가가 체념을 거부하고 줄곧 희망이라는 미끼를 물고 싶어 했다.

 

인생은 허무의 연속이고, 행복은 잡을 수 없는 것이란 걸 알지만,  인간은 순간 느끼는 삶에 대한 욕망과 희망에 또다시 속는다. 그 결과는 더 깊은 허무만 남을 뿐.

 

그들은 떠나갔다.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여자는 모래 언덕 꼭대기에서 걸음을 멈추고 잠시 주저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제 그곳에 없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페는 비어있었다.

 

그녀는 남편과 떠나고, 그는 어디로 간 걸까? 

모래 위에서 마지막 발버둥을 치던 새들처럼 힘겨운 삶을 이어가던 그 또한 고요한 평안으로 돌아간 걸까?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로마>에서 가정부 클레오는 죽은 척하는 페페를 따라 하며 잠시 일을 멈추고 평상에 누워 말한다. "죽어있는 것도 괜찮다" 

 

Maybe I'm not leaving. Maybe I'm going home. <영화_ 가타카>

 

고통과 허무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무모하고 대책 없는 헛된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의 나약함 그리고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짧지만 여운이 남는 소설이다.

 

 

 

 

 

 

 

 

 

 

 

 

 책을 읽으며 알랭 드 보통의 <불안>과, 최애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생각났다.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처럼 좋은 시와 책, 영화, 음악과 그림을 소개받을 수 있는 책은 마른대지에 단비와 같다. 나의 지적인 호기심을 채워준다. 이 책 역시 그렇다.

 

허무, nothingness, 세상의 진리나 인생 따위가 공허하고 무의미함을 이르는 말.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할 수는 있는 걸까?...... 그냥 함께 살 수밖에.

이 책은 인생의 허무를 인정하고 나의 관점을 바꾸어 인생을 더 잘 살 수 있도록 조언해 주는 책이다.

(이 점에서 알랭 드 보통의 <불안>과 흡사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 오오 봄이여 /
<김수영의 봄 밤 중>

 

 

 

 인생은 허무의 물결로 가득하다. 아쉽게 끝나버리는 봄, 잡을 수 없는 찰나, 영속할 수 없는 인생, 불멸코자 찍은 사진과 영상도 시간의 횡포에 발해지고 희미해진다.

숲과 강과 호수 뷰를 자랑하는 100억 아파트에 사는 부자도,  비탈진 좁은 골목 월세 살이하는 가난한 자도, 노인도 아이도, 덕이 충만한 자도 비열한 기회주의 자도 모두 허무로 돌아간다. 다행히 죽음은 허망하지만 평등하다. 

우연이 지배하는 인생을 어쩔 순 없지만, 닥칠 죽음은 '대상화'하여 나만의 축제로 만들 수 있다.

 

여기에 유한한 인생을 올바르게 마치기 위해 명심할 교훈이 있네. 그것은 바로 죽음의 춤. 누구나 이 춤을 배워야 하네.
<생이노상 수도원 벽화에 적힌 대화 시>

 

 

 

 우리는 노동한다. 생계와 관련 있는 일이던 권태를 견디기 위한 일이던. 그 사소한 일에 숨어있는 선하고 아름다운 의도들을 발견해 보자. 찻잔 하나를 디자인하며 아름다움을 위해 공들이고, 맛있는 식사를 준비하며 사람들의 건강과 미소를 생각하고,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노래 하나를 고르며 즐거워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하루의 나날들을 지내다 보면 우울과 절망이 닥쳐오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구름이 흘러가듯이 기다리자. 애타도록 서두르지는 말자. 

 

패턴은 일상의 행동에 작은 전구를 일정한 간격으로 달아놓는 일이기에, 삶은 패턴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빛나게 된다. 이 반복과 패턴이 자아내는 아름다움과 리듬은 뭔가 지금 제대로 작동 중이라는 암묵적인 신호를 보낸다.

 

 

 

 허무의 물결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음과 시간에 대한 관점을 달리해 보자.

죽음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가듯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우리는 태어나기 이전 상태에 대해 슬퍼한 적이 없다.  죽음으로 인한 부재도 어찌 보면 같은 상태 아닐까?

나의 중심을 외부에 두지 않고 탄력 있는 마음에 둔다면 관점을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다. 거대한 산의 진면목을 알려면 먼 곳에서 산을 조망해야 한다.

 

승리는 승리고, 패배는 패배다. 하나의 패배를 인정했다고 해서 모든 패배를 인정할 필요는 없다. 하나의 패배도 모든 면에서 패배인 것은 아니다. 모든 관점에서 다 패배인 경우는 없다. 어떤 패배를 해도 인생 전체가 패배로 변하는 경우는 없다. 현실을 여러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마음의 탄력을 갖는 것이 진정한 정신승리다.

 

 

 

 저자는 목적은 결국 삶을 배신하기 마련이므로 오랫동안 목적 없는 삶을 원해왔다고 한다. 산책을 좋아하는 이유 또한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 또한 산책과 여행을 즐긴다. 

MBTI / J 100%인 남편 덕에 가을까지 여행 계획이 꽉 차있다. 

직장에서 돌아온 후, 소박하지만 맛있는 저녁식사를 마주할 때 우리는 '우행시'(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라고 말하곤 한다. 

외식을 하는 날엔 행복하기 그지없다. 새로운 음식을 먹고 새로운 장소를 가는 것에 나는 요즘 열광한다.

인생을 즐긴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하나 이상의 음식을 먹을 때는 과정의 서사를 즐겨야 한다. 코스요리에서는 횡적인 기승전결을 누리고, 한상차림에서는 거대한 화폭을 감상하는 자세를 갖춘다.

 

 

무릇 천지간의 사물은 각기 주인이 있소.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라면 터럭 하나라도 취해서는 아니 되오. 오직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 사이의 밝은 달은 귀가 취하면 소리가 되고, 눈이 마주하면 풍경이 되오. 그것들은 취하여도 금함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소. 이것이야말로 조물주의 무진장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즐길 바이외다. <소식, 적벽부 중>

 

 

 

 

 

 

 

 

 

 

 

 

 

 

 

"불안은 현대의 야망의 하녀다."

인간은 걱정과 불안 없이 살 수 없고, 쓸데없는 걱정조차 만들어 불안해한다. 

 

저자는 불안의 원인을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으로 설명하고,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의 견지에서 해법을 제시한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심, 더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욕망, 자녀들에 대한 기대, 남보다 우월하고자 하는 이기심, 이 모든 욕심과 욕망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게다가 전혀 인간적이지 않은 세상의 부조리함 속에서 확실한 것 하나 없고,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는 판단을 교란시키고 극기야 인간의 존엄마저 잃게 만든다.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철학

 

나를 부유하게 하는 것은 사회에서 내가 차지하는 자리가 아니라 나의 판단이다._에픽테토스 <어록>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며 자학하는 습관을 버리고 그들의 의견이 과연 귀를 기울일 만한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사랑을 구하는 사람들의 정신에 존경할 만한 구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도 있다.

 

모든 질책은 그것이 과녁을 적중하는 만큼만 피해를 줄 수 있다. 자신이 어떤 질책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만만하게 그런 질책을 경멸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한다._쇼펜하우어

 

 

 

예술

 

소설가는 사회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표준 렌즈, 즉 부와 권력을 확대해 보여주는 렌즈를 인격의 특질을 확대해 보여주는 도덕적 렌즈로 바꾼다. 도덕적 렌즈로 보면 높고 강한 사람은 작아지며, 잊혀 뒤로 물러나 있던 인물이 오히려 크게 보일 수 있다. 소설의 세계에서 덕의 움직임은 물질적 부와 아무 관계가 없다.

 

 

 

정치

 

사회의 목소리 큰 사람들이 선험적 진리로 여기는 견해들이 사실은 상대적인 것이고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정치적 의식이 깨어난다.

 

억압적 상황은 영원한 고통을 겪으라는 자연의 심판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변화 가능한 어떤 사회 세력들 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죄책감과 수치감은 이해로, 지위의 더 평등한 분배 방식에 대한 탐구로 바뀔 수도 있다.

 

 

 

기독교

 

기독교적인 죽음의 경고 memento mori의 훌륭한 전통 안에 자리 잡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에 세속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을, 휘스트와 저녁 파티보다 진실과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해골 앞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억압적인 의견도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폐허는 우리의 노력을, 완전과 완성이라는 이미지를 버리라고 한다. 폐허는 우리가 시간에 도전할 수 없다는 사실, 우리는 파괴의 힘이 장난감일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기독교 도덕가들은 불안을 달래려면 낙관적인 사람들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모든 것이 최악으로 흘러간다고 강조하는 것이 최선이라도 생각했다.

 

따라서 지위에 대한 우리의 하찮은 걱정을 천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우리 자신의 미미함을 바라보며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된다.

 

 

 

보헤미아

 

주류 문화와 갈등하면서도 자신 있게 살아가려면 우리의 직접적인 환경에서 작동하는 가치 체계, 우리가 사교적으로 어울리는 사람들, 우리가 읽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보헤미안들의 통찰이다. 

 

가장 넓은, 가장 포괄적인 말로 보헤미아의 기여를 요약하자면 그들이 대안적인 삶의 방식 추구에 정통성을 부여했다고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존중하는 하위문화의 경계를 정하고 의미를 규정했는데, 이곳에서는 부르주아 주류가 과소평가하고 간과하는 가치들이 적절한 권위와 위엄을 부여받았다.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리고 매 순간 노력해야 한다.

성공과 행복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가득하고 너그러운 사람이다.

죽음 앞에서 모두는 평등하다.

 

영화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 The Last World>에서 해리엇은 80세에 자신의 부고기사를 미리 쓰기 위해 사망기사 전문기자인 앤을 고용한다. 잘 나가는 광고 에이전시 보스였지만 까칠하고 배려라곤 없었던 그녀는 죽음 앞에서 그녀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가족들의 사랑도, 동료들의 칭찬도 받을 수 없었던 그녀. 누군가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적이 없었던 그녀는 남은 기간 인생을 다시 살며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코미디 영화라 무겁지 않게 재미있게 봤지만 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영화였다.

 

 

 

욕망의 하녀가 되어 매 순간 불안한 삶을 살 것인가? 사랑하며 하루하루를 채워 나갈 것인가? 

 

메멘토 모리.

나의 죽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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