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 정동진 독립 영화제를 다녀왔다.
내 기억 속 강릉은 에메랄드 빛 바다, 수제 맥주, 향긋한 커피의 낭만적인 장소다.
이 여름, 휴가여행으로 선택한 강릉 또한 잊지 못할 것이다. 별이 쏟아지는 여름밤, 대형 스크린에 떠오르는 영화들, 현장이 주었던 다정한 분위기가 꿈만 같다.
강릉 고래책방에서 구입한 뒤라스의 소설 <연인>.
마음에 두었던 책이었는데 마침 눈에 띄었고, 생각보다 두께가 얇아 놀랐다.
표지에는 영화 <연인>의 주연, 제인마치의 사진이 원서의 뒤라스 사진과 같은 분위기로 연출되어 있다.
마리그리트 뒤라스가 70대에 쓴 <연인>은 그녀의 자전적 소설이다.
1929년 프랑스령 베트남이 배경인 소설은, 전쟁과 식민지, 인종과 계급, 부와 가난 등이 뒤엉킨 상황 속에서, 뒤틀린 가족의 이야기 그리고 중국인 부호 아들과 가난한 프랑스 소녀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뒤라스의 자전적 소설이지만, 영속할 수 없는 기억 그리고 망각으로, 어느 부분이 미화이고 과장인지, 픽션인지 알 수 없지만, 삼십 대의 젊은 중국인과 열다섯 반 프랑스 소녀와의 사랑과 육체관계는 굉장히 파격적이다. 어린 소녀의 욕망과 대담함도 놀라울 따름이다.
지금, 이 글에서는 그 젊은 날의 숨겨진 시기, 그 어떤 사실, 감정, 사건 들에 대해서, 그 묻혀 있던 것들을 캐내려 한다.
소녀의 엄마
_ 삶에 대한 암담한 절망, 어머니는 날마다 그 절망에 시달리며 지냈다.
_ 나는 그에게 내 어린 시절 내내 어머니의 불행이 꿈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꿈은 바로 어머니였다.
_ 그녀는 신중하지 못했고, 주책스러웠고, 무책임했다. 어머니는 늘 그랬다. 어머니는 그저 살아가기만 했다.
_어머니가 이따금씩 아주 행복해지는 시간, 온 집안을 대 청소하며 모든 것을 잊는 시간이었다. (....) 갑자기 호수, 강가의 들판, 개울, 해변처럼 변해 버린 이 집에서 우리도 행복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모두가,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한다.
_ 어떤 일에서도 끝까지 버텨 내는 기질 말이다. 그녀는 어떤 것도 그냥 내버려 두는 일이 없다. 사촌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고통이나 고역에 대해서마저도 포기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한다.
큰 오빠
_ 내게 전쟁은 큰 오빠와도 같다. 전쟁은 큰오빠처럼 도처에 번지고, 침입하고, 훔치고, 또 감금한다. (....) 악은 바로 거기에, 우리 피부에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작은오빠
_ 내가 그에 대해 품고 있는 이 무모한 사랑은 나에게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비로 남아 있다. 왜 내가 따라 죽고 싶을 만큼이나 그를 사랑했는지, 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 내가 이 사랑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은 지 10년이 지났고, 그래서 그에 대해 거의 생각하고 있지 않을 무렵이었다. 나는 영원히 그를 사랑할 것 같았고, 이 사랑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죽음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_ 내 작은 오빠는 불멸이었다.
가족
_ 우리 가족이 서로에게 품었던 사랑, 또 끔찍한 증오, 파산과 죽음이 뒤엉킨 우리 가족 공동의 이야기.
_ 늘 무리 속에서 고립된 존재들로 있는 그들.
_ 대화라는 단어는 허영이다. 이 집에 가장 잘 어울리는 어휘는 수치와 자만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가족은 삶을 살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근원적인 수치심 속에 빠져있다. 우리 형제들의 이야기 가장 깊숙한 곳에는 우리 세 사람이 사회가 목 졸라 죽인 우리 어머니, 그 선량한 여인의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우리는 어머니를 절망에 빠뜨려 버린 이 사회의 한편에 비켜서 있다. 그토록 다정하고, 그토록 남을 쉽게 믿는 우리 어머니에게 사람들이 저지른 짓들 때문에, 우리는 삶을 증오하고, 우리 자신을 증오하고 있다.
연인
_ 처음부터 우리는 두 사람이 공유하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미래에 대해서는 결코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_ 두려움을 넘어 사랑할 힘이 없기 때문에 그는 곧잘 운다. 그의 영웅심. 그것은 바로 나이고, 그의 노예 근성, 그것은 그의 아버지의 재산이다.
_ 그녀를 향한 자신에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해도 그녀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것은 그 자신도 아직 잘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는 그 사랑을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_ 그렇게 나는 그의 아기가 되었다. 그도 역시 나에게는 또 다른 무엇이 되었다.
그녀의 연인은 그의 아버지 뜻대로 중국인 부호 딸과 결혼하고, 소녀는 프랑스로 떠나기 위해 배를 탄다. 떠나는 배에서 그녀는 육지를 바라보다, 그의 길고 검은 차, 그리고 하얀 양복을 입은 실루엣을 발견한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도 그를 보았다.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은 그렇게 끝이 난다.
대양을 횡단하던 어느 밤, 배의 중앙 갑판 응접실에서 쇼팽의 왈츠가 울려퍼진 순간, 끝난 줄 알았던 사랑이 아프고 슬프게 살아난다.
그리고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콜랑의 그 남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불현듯 예전에 자신이 콜랑의 남자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런 종류의 사랑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제 그는 모래 속에 스며든 물처럼 이야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이제야, 쇼팽의 음악이 큰 소리로 퍼지는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겨우 다시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작은 오빠가 죽은 후에야 그의 불멸을 기억해 냈듯이.
불멸성은, 결코, 불멸성으로 눈에 띄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절대적인 이원성이다. 그것은 세부적인 것에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근원 속에서만 존재한다. 어떤 사람들은 불멸성의 존재를 품을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하는 줄을 모르고 있다는 조건에서이다. 마찬가지로,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내면에서 그 불멸성의 존재를 간파해 낼 수 있는데, 그것도 똑같은 조건에서, 즉 그들이 그럴 능력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서이다. 이런 불멸성이 살아 있을 때에만, 삶은 불멸의 것이 된다.
불멸성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소녀는 콜랑의 그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무모한 용기라도 내어 그녀를 선택해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전쟁은 끝나고 몇 해가 흐르고, 몇 번의 결혼과 몇 번의 이혼에서 아이들을 낳고, 책을 쓰는 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파리에 방문한 콜랑의 남자는 그녀에게 전화를 한다.
그의 사랑은 예전과 똑같다고. 그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결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죽는 순간까지 그녀만을 사랑할 거라고.
소설의 아름다운 표현들이 인상적이었다.
서로에게 고통의 씨앗이 되는 가족, 욕망과 사랑, 불멸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 준 책이다.
책을 본 후 다시 영화를 보니,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책을 먼저 읽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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