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생각의 나무> 절판                   <2012, 청미래>

 


 

서양철학을 재미있게 읽고 싶은 분들께 추천한다.

알랭 드 보통의 글은 재미있다. 특유의 농담과 유머는 글을 지루하지 않게 하고, 사진이나 그림 등의 시각적인 효과도 한몫한다. 철학처럼 무거운 이야기마저도 유쾌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무엇보다 저자의 박학한 지식은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다음 여섯 명의 철학자를 소개하고 있다.

 


소크라테스_인기 없음에 대한 위안

에피쿠로스 _충분한 돈을 갖지 못한 데 대한 위안

세네카 _좌절에 대한 위안

몽테뉴 _부적절한 존재에 대한 위안

쇼펜하우어_상심한 마음을 위한 위안

니체 _곤경에 대한 위안

 


2005년 출판된 책으로 읽었다. 책의 제목이 영어로는 『THE CONSOLATION OF PHILOSOPHY (철학의 위안) 』, 부제는『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 그리고 제목은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이다.

 

책꽂이에서 내 눈을 자주 사로잡았던 책.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제목, <베르테르의 기쁨> 때문이었다. 왜 슬픔이 아닌 기쁨일까........?

 

책을 읽는 동안 전반적으로 그 느낌이 오긴 했지만, 그 해답은 쇼펜하우어의 상심한 마음을 위한 위안 편에서 찾을 수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 철학자이다. 그는 이 지구 상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물론 인간을 포함해서, 무의미한 생존을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두더지의 삶을 보자.

 

삽처럼 생긴 커다란 발로 끊임없이 땅을 파는 것은 두더지가 평생 짊어진 숙명이다. 두더지의 주변에는 영원한 어둠뿐이다. 두더지의 눈이 덜 발달한 것은 단지 빛을 피하기 위해서다. 즐거움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고난으로 꽉 찬 일생을 통해 두더지는 무엇을 얻을까?.......... 삶의 고난과 고통은 삶에서 얻는 과실이나 이득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가혹하다.

 

_쇼펜하우어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中> 

 

 

개미는 어떨까?

 

대부분의 벌레들의 삶은 자신들의 알에서 태어날 미래의 자손들을 위한 음식물과 주거 공간을 준비하느라 줄기차게 노력하는 근면의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자손들 또한 똑같이 그 일을 반복한다.......... 이런 노력으로 개미들이 무엇을 얻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허기와 성적 열정을 만족시키는 것 외에 달리 보여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_쇼펜하우어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中>

 

 

인간은 다를까?

 

인간도 사랑을 추구하고, 장래 파트너가 될 사람과 카페에서 잡담을 나누고, 아기을 가지고, 두더지나 개미와 비슷한 선택의 과정을 겪으며 그런 생명체보다 별로 더 행복하지도 않다.

 

_쇼펜하우어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中>

 

 

쇼펜하우어의 위와 같은 견해는 모든 생명체의 삶은 행복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감내하면서 생식과 번식을 최종 목표로 그냥 사는 것이다. 살아생전에 행복 사냥을 하는 것은 아무런 성과가 없는 헛된 일일수밖에 없다.

 

그러나 철학자는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도 준다. 고통의 삶 가운데도 인간에겐 두더지에게 없는 한 가지 장점이 있다는 것! 그것은 바로....... 극장, 오페라, 콘서트홀, 철학, 서사시 등 '예술과 철학 작품' 들이다.

 

우리 자신의 고통과 투쟁  (예술과 철학 작품 속에서) 소리, 언어, 이미지로 재현됨  → 작품 속에서 고통은 객관화됨→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삶의 양상들에 형태가 부여 → 우리 상황을 설명함으로 덜 외롭고 혼란을 겪지 않도록 도와줌

 

즉, 인간은 두더지처럼 굴을 파면서도 틈틈이 우리 고뇌의 순간을 통찰할 기회를 얻을 수 있고, 그럼으로써 고민을 해결하고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작품들은 우리를 알지 못하면서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_쇼펜하우어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中>

 

이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한번 적용해 보자. 사랑의 고통과 투쟁하는 한 사람이 있다. 그/그녀는 이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혹은 작품 가운데 어떤 메시지를 통해)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란 생각을 하며 위로를 받는다. 차츰 고통이 누그러지면서 객관성이 확보되기 시작하고,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한 베르테르를 보며 자신의 상황을 정확히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베르테르의 슬픔은 다수의 독자들에게 사랑의 고통 가운데서 헤어 나와 기쁨을 줄 수 있는 하나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그 자신의 삶의 여정에서, 그리고 삶의 불행에서 그 사람은 이제 자신의 개인적인 운명보다는 전체로서 인류의 운명을 더 돌아볼 것이다. 따라서 고통받는 존재보다는 뭔가를 아는 사람(knower)으로서 행동할 것이다.

 

_알랭 드 보통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中>

 

 

 

어둠 속에서 땅을 파는 사이사이에 우리는 자신의 눈물을 지식(knowledge)으로 바꾸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_알랭 드 보통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中>

 

 

세상이 도통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다. 태어나는 것부터가 각자의 선택이 아니었으므로 원하지 않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 애쓰며 살지만 모든 일이 노력과 비례하지는 않는다. 정의롭지 못하고 악한 세력들이 판을 치고 부를 쌓아가고 있다. 원하지 않는 재앙과 질병들이 닥쳐온다. 우리는 이런 상황들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인생은 고통으로 이루어진 것을 우리는 알고 있으니 인생을 즐기려고 애쓰지 말고 고통 가운데 바라만 보아야 하는가? 니체의 사상을 소개한 알랭 드 보통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지식으로 바꾸어 보자.

  

 

정원사의 철학

 

니체는 역설했다. 인간은 정원사처럼 자신의 곤경을 돌보아야 한다고. 식물의 잠재력을 믿는 정원사처럼. 삶에서도 식물의 뿌리에 해당하는 수준에서는 여러 어려운 감정과 상황에 처할 수 있지만, 그런 것들은 사려 깊은 재배를 통하여 더없이 위대한 업적과 환희로 결실을 맺을 수도 있다.

 

_알랭 드 보통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中>

 

 

니체의 철학은 우리 마음에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감정인 욕심, 질투, 욕망, 분노, 시기, 허무 등을 애써 감추려 하지 말고, 그것들을 세련되게 관리하고 사려 깊게 재배하여 무언가 아름다운 것들을 일구어 내자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코로나 19로 집안에만 갇혀 공부하는 고3 딸이 얼마 전 했던 말이 생각난다. 노력 없이 잘 되는 친구들을 보면 갑자기 우울해진다고....... 하지만 그런 생각이 머리를 채워 공부에 집중이 안 될 때는 존 롤스의 정의론을 떠올리면서 위로를 받는다는...........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사랑스러운 딸도 누군가의 작품을 통해서 위로를 받고 있었던 거다.

 

 

책의 제목 『THE CONSOLATION OF PHILOSOPHY (철학의 위안) 』,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모두 이 책을 다 읽은 후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들이었다. 이 책에 소개된 여러 철학자들은 우리 각자의 상황에 따라 시기적절한 위안을 줄 수 있으며, 우리 인생을 좀 더 사려 깊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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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민음사>

 


 

이청준의 중, 단편 소설 모음집이다.

 

소문의 벽
뺑소니 사고
개백정
병신과 머저리
가면의 꿈
퇴원
꽃동네의 합창
눈길
매잡이

 

그만의 독특한 형식과 어투로 쓰인 아홉 편의 이야기들 모두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의 소설이다.

도무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세상...... 그 속에서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고뇌와 상처, 그리고 결국 파멸로 치닫는 결말 등은 책을 잡고 있는 내내 나 역시도 혼란스러웠다.  

 

거짓, 억압, 강요, 증오 등 온갖 언어로 다 표현할 수도 없는 삶의 부조리함은 그 안에 몸을 담고 살아가는 누구라도 정상적으로 살 수 없게 만들 수밖에 없어 보인다. 아니 오히려, 이런 세상에서 미치지 않고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로 말이다.


나의 생각을 사실대로 말할 수도 쓸 수도 없는 사회적 현실로 인해 미친 척하는 소설가.
<소문의 벽>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어 거짓으로 금식을 한 민족의 은인과,  그가 죽은 후 역사 앞에 진실을 밝히고자 했던 한 기자의 의문의 죽음. <뺑소니 사고>


6.25 시절, 반동분자로 몰린 외가댁의 처참한 몰락과, 개를 도살해 가죽을 벗겨가는 개 공출로 인해 
가족과 같았던 개를 잃게되는 한 가정의 고통. <개백정>


6.25 전쟁의 상처를 가지고 사는 의사 형과, 전후 세대를 살며 또 다른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화가 동생.
<병신과 머저리>


나의 본 모습을 감추고 꾸며진 나로 살지만, 밤에는 거짓된 나의 모습을 가면으로 가리고 위로를 받는 한 판사와 
그를 바라보는 아내의 혼란. <가면의 꿈>


어린시절의 아버지의 강압과 군복무 시절의 상처로 인해 병원으로 도피하여 나 자신을 가두어 두는 주인공.
<퇴원>


동요 '고향의 봄'의 명성과는 다르게, 노랫말을 쓴 주인공이 현실의 삶에서는 빈곤하게 지내고 있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원수 선생님 이야기. <꽃동네의 합창>


⊙ 어린시절 부모로부터 사랑과 보호를 받기는커녕 온갖 희생을 강요당한 주인공은 
출가 후 부모에게 진 빚이 없다고 생각하며 어머니에게 매정하게 굴지만, 오랜만에 찾은 고향길에서 몰랐던 어머니 사랑을 깨닫는 이야기.  <눈길>


자본주의 사회에 물들지 않고 진정한 장인의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매잡이의 비극적 삶과, 
진정성 있는 소설을 쓰려고 노력하지만 한 편의 소설도 남기지 못한 소설가의 비극. <매잡이>

 

 

다양한 시대 상황,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상처로 얼룩진 이야기를 읽고, 삶이란 것은 진정 고통일 수밖에 없는가? 또 뻔한 의문이 든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는 거짓된 소문들, 진실을 말해도 용납되지 않는 세상, 힘을 잃은 약자가 되었을 때 당할 수밖에 없는 수모, 사람과 관계에 상처 받으며 끊임없이 열등감에 빠져가는 현대인들, 먹고 살기위해 참아내야만 하는 나의 본질, 강요당해야만 하는 상황들,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과 자신의 가치를 지켜나갈 수 없게 만드는 세속적 잣대들.......

 

이런 것들을 온전히 비켜가는 인생이란 과연 있을 수 있을까?


한 철학자의 말처럼, 저항할 수 없는 악에 맞서 고통을 경감시키는 한 가지 방법은 숙명에 굴복하며 참아내는 것일까? 

저항하느라 힘을 빼지 말고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파악하여 순응하는 삶을 사는 것이 과연 지혜일까?

 


삶의 단편들을 놓고 흐느껴봐야 무슨 소용 있겠어? 온 삶이 눈물을 요구하는 걸. _Seneca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中_알랭 드 보통>

 


삶을 사느라 치열했고, 살기 위해 고민했고, 자아를 찾고자 노력했던 주인공들의 삶은 너무 고된 것이어서 슬프고 안타깝다. 그리고
우리네 삶도 이들과 많이 달라 보이진 않는다. 정답이 없는 삶의 길을 부디 눈물로만 살다가지 않기를 희망한다. 모두 말이다.

 




 

 

 

 

 

 

 

 

 

<1999, 민음사>

 


 

루이제린저의 <삶의 한가운데서>를 읽은 후, 내친김에 이 책을 읽었다.

<삶의 한가운데서>의 주인공 슈타인과 이 책의 베르테르의 죽음은, 사랑의 고귀함을 위해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볼 수 있지만, 두 인물은 확연한 차이가 있어 보인다. 이성적이고, 견디고, 기다리며, 오롯이 참아내는 슈타인과는 달리, 베르테르는 감정적이고, 표현하고 역정적이며 뜨겁다.

 

괴테는 이 책을 25세 때, 2주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질풍노도 시기인 젊은이들의 감성과, 자신과 친구의 실제 경험, 그리고 신들린 듯한 속도로 창작된 그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 작품의 많은 부분들이 공감된다. 책은 젊은 베르테르가 친구 빌헤름에게 보낸 편지와 그 편지를 엮은이의 글로 이어지는 서간체 형식으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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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하지만 시민계급 출신인 베르테르는 작은 시골마을로 와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그는 유머 있고 소박하며 관습에 얽매인 생활을 못 견디는 젊은 방랑자 같다. 자연과 아이들을 좋아하고, 불쌍한 이웃들을 도와주고, 자유를 꿈꾸는 그의 모습은 철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삶을 즐길 줄 아는 여유가 엿보인다. 돈과 명예를 향한 욕심 없이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고자 했던 그의 모습은 마치 인생의 도를 깨달은 철학자 같기도 하다.

 

 

사람들은 대개 오로지 생계를 위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다가 약간 남아돌아가는 자유 시간이라도 생기면, 도리어 마음이 불안해져서 거기서 벗어나려고 온갖 수단을 다 쓴단 말이다.

 

그리고 모든 활동이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집중되고 있으며, 욕망이라는 것 자체에도 우리의 불쌍한 삶을 연장시키는 것 말고는 다른 목적이 없다는 사실을 통찰할 때, 그리고 또 연구가 어느 단계에 올라 만족할 수 있음은, 인간이 자신이 갇혀 있는 감방의 벽에다가 여러 풍경과 형상들을 화려하고 밝은 색으로 그려놓고 기뻐하고 있는 식의 허울 좋은 체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 ―――― 이 모든 것을 생각해 볼 때, 빌헤름 나는 할 말이 없어지고 만다.

 

 

이렇듯 삶의 진정한 가치를 세상의 욕망에 두지 않는 그에게는 주위를 둘러싼 모든 자연들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위대하며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풍경들이었다.  이런 삶의 소박한 기쁨을 느끼는 베르테르는 우울증 마저도 인정하지 않는 쿨한 낙관론자였다.

 

 

우울증이란 꼭 게으름 같다고 할 수 있지요, 그것은 게으름의 일종입니다. 우리 인간의 천성은 게으름으로 기울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일단 마음을 가다듬고 분발하기만 하면 일은 잘 진척되고 활동 속에서 참다운 기쁨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더군다나 각자가 그래도 가금 자기 마음에 간직할 수 있는 즐거움마저 서로 빼앗아버려야 한단 말입니까?

 

 

그러던 그는 로테라는 법무관의 딸을 알게 되고, 첫눈에 사랑하게 된다. 베르테르가 묘사한 로테는 그지없이 아름다운 닮고 싶은 인물이다.

 

 

그녀는 그토록 총명하면서도 그토록 순진하고, 그렇게 꿋꿋하면서도 그같이 마음씨 곱고, 착하고 친절할 뿐만 아니라, 정말로 발랄하고 활동적이면서도 침착한 마음의 여유를 지니고 있다.

 

 

게다가 외모마저도 아름다운 이런 사람이 있을까?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로테에게는 알베르트라는 훌륭한 성품의 약혼자가 있었던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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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후반부로 가면서 그는 자신이 인정하지 않았었던 우울증에서 스스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가 찬양하고 노래했던 모든 아름다운 자연들은 상막하고 음침하며 고통스러운 형상으로 그에게 다가온다. 도대체 한 여자를 향한 사랑이 무엇이길래 그 아름다운 청년의 마음을 이다지도 망쳐놓을 수 있는 것인가! 

그는 서기관으로 일하면서 상사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못하고 사직했고, 한 귀족 사교모임에서는 신분의 차이로 인해 수모를 겪기도 한다. 결국 그의 낭만적인 이상과 현실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삶에 부적응한 인물로 낙인 된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모든 행복의 원천이 내 가슴속에 깃들여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결국 모든 불행의 원인이 내 마음속에 잠겨있다.

 

그의 정신의 조화는 완전히 깨어지고, 내심의 흥분과 격정은 그의 본성이 지녔던 모든 힘을 뒤죽박죽으로 혼란시켰을 뿐 아니라 가장 불행한 작용을 일으켜서, 마침내 그는 일종의 허탈 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로테의 사랑을 강요할 수 없는 처지, 알베르트에 대한 열등감, 사회적 관계에 가득한 불만, 신분제도의 역겨움....... , 더 이상 살아갈 힘을 잃은 그는 삶을 스스로 마감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그에게는 또 다른 희망이었다. 도무지 극복할 수 없어 보이는 현실의 문제들을 저세상에서 이루려는 욕심이 이끄는 희망.

 

 

이것은 절망이 아닙니다, 스스로 참고 견디어 냈다는 것, 당신을 위해서 스스로 몸을 바쳐 희생하겠다는 것에 대한 확신입니다.

 

오오, 로테, 나는 먼저 갑니다. 당신이 오면, 나는 뛰어가서 당신을 반갑게 맞이하고 당신을 붙잡고, 당신 곁에서 떠나지 않은 채 무한한 신께서 내려다보시는 가운데서 영원한 포옹을 계속할 겁니다.

 

 

 

슈타인의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사랑과 죽음과는 다르게, 베르테르의 사랑과 인생은 무모하고 불편한 그래서 슬픈 이야기로 느껴진다. 한 인간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하나의 생각과 상황이 자신을 알 수 없는 세계로 이끌어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참 두려워진다. 

 

18세기 이 책을 읽은 많은 젊은이들 사이에 자살이 유행처럼 번져나갔다고 한다. 그래서 '베르테르 효과'라는 말도 있다.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읽는 책들 중 다수는 죽음, 그 가운데도 자살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독자들에게 미화되어 보이는 경우도 많이 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격정적인 사랑이야기는 안타깝고 슬프지만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다. 좀 더 이성적이었다면...... 고뇌 속에 누군가 위로가 되어주었다면...... 다른 인연이 다가왔었다면....... 그러나 그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한 개인의 마음에 감추어진 논리와 그 복잡한 감정들을....... 인간은 참으로 약하고 슬픈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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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1999>

 


 

루이제린저의 소설 <삶의 한가운데>.......  요 며칠 푹 빠져있던 책이다.

 

제목처럼, 삶의 한가운데 내던져진 한 여인의 인생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녀만의 이야기가 아닌, 위태로운 삶 속에서 각기 다른 삶의 모습과 다른 자세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삶이란 수수께끼 같고 불완전하지만 눈부시도록 아름다울 수 있는 우리 삶 말이다.

 

주인공은 니나 부슈만그녀를 사랑하는 슈타인, 그리고 1인칭 화자가 되어 글을 전개해 나가는 그녀의 언니 마르그레트이다. 슈타인이 니나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18년 동안 쓰고 간직해 놓은 니나에 대한 모든 기록들과, 니나와 마르그레트의의 짧은 만남 속 대화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니나는 평범한 여인은 아닌 것 같다. 시대가 많이 바뀐 현시대에 살아간다 하더라도 그녀는 분명 튀는 존재이었으리라.

어려서 패혈증을 앓고, 어려워진 집안 사정으로 학업을 포기한 후, 객지에서 친척 할머니의 가게를 맡아 운영하게 되면서 할머니의 병간호와 죽음을 혼자 감당해낸다. 그 와중에 유태인을 도와 반 나치즘 활동을 하며 위태로운 생활을 이어간다. 그 후, 원치 않았던 임신과 결혼, 두 번의 출산, 자살시도, 이혼, 정치범으로의 수감생활, 종전과 석방, 작가로서의 활동 그리고 좋지 않은 평판 등등.......

마흔이 채 되기도 전인 38년 인생에서 너무나 많은 경험을 한 존재였다.

 

그 모든 과정에 그녀를 돕고 사랑했던 슈타인이 있었다. 그는 의사였고 교수였다.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 규범적이며 항상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다. (그에게 니나라니!) 패혈증으로 병원에 찾아온 그녀를 본 이후, 줄곧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20살 연하의 그녀. 황야의 바람이 불어온 것 같은 느낌의 깡마르고 차가운 느낌의 그녀를 말이다.

 

 

"의지와 상관없이, 그러나, 나는 니나를 변함없는 강도로 계속 사랑한다. 나는 내 인생의 힘 전부를 이 한 점에 쏟아놓고 있는 것 같다. "

 

 

그녀를 향한 사랑으로부터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슈타인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사는 니나의 모든 것을 지켜보며 얼마나 심적 번뇌와 고통을 겪어냈을까? 그것을 짐작하는 것조차도 고통스럽다. 그녀를 가질 수 있는 몇 번의 기회도 스스로 잡지 못한다. 모든 것을 주기만 한 사랑, 강요와 속박 없이 자유롭게 그녀를 내버려 두는 그의 사랑은 고귀하지만 답답하고 너무 마음이 아프다. 

 

니나의 사랑이 확실치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그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그의 모험 없는 삶을 경멸했기 때문에?  아니면, 슈타인 자신이 니나와의 삶이 불행할 것이라고 예견했기 때문에? 그의 열등감과 자존심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우유부단함과 용기 없음으로 인해?........ , 나중에 슈타인의 고백을 보면, 아마도 자신이 갖지 못한 세계에 대한 동경이 니나를 향한 사랑으로 표현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니나를 얻기 위한 투쟁은 한 특별한 여성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특수한 방향으로 나 자신의 본질을 인식하고 발전시키려는 투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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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는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힘겨운 인생을 살았지만, 매 순간 삶을 사랑하고 살아내려는 의지가 강한 여성이었다. 사실 잘 이해되지는 않지만, 자살시도마저도 삶에 대한 열정을 담고 있는 듯이 보인다.

 

 

"내가 의식을 잃기 시작한 때만큼 생을 미치도록 강력하게, 정말 지겨우면서도 멋지다고 느껴본 적이 전에는 없었어요."

 

 

니나는 걱정 없이 안정적이며 조용히 흘러가는 인생을 살기를 원치 않는다. 모험적이고 생산적이고 도전하는 삶을 원한다. 그녀는 모든 것을 경험하고 싶어 하고, 모든 순간을 자신의 삶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며, 그것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즐기기까지 한다. 어찌 되었든 살아내려고 하고 그 가운데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고통의 한가운데에는 아무리 심한 고통도 닿지 않는 보호 구역이 있어. 그리고 그곳에는 일종의 기쁨이 있어. 나는 그것을 용납이 가져다준 승리의 구역이라고 이름 붙이겠어."

 

 

나의 삶은 마르그레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소란스러운 일들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다른 이들과 별다를 게 없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감당해 내고 있다. 다정한 남편, 인생공부를 하고 있는 청년 아들과, 고3을 긍정적으로 보내고 있는 딸, 시어머님은 누워계시지만, 늘 응원해 주시는 부모님, 일할 수 있는 직장 등 말이다.

 

난 내 삶을 그쪽으로 유도하고 선택하였을 뿐이다. 어려서부터 좀 더 모험적으로 인생을 선택할 안목과 용기가 있었다면 조금은 다른 인생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천성이 또 자라온 환경들이 나와 담합하여 그러지 못하게 했다. 니나의 삶을 온전히 동경하지는 않지만, 그녀가 삶을 바라보는 자세,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실행들은 부럽기까지 하다.

 

부끄럽지만 나는 이제부터라도 조금씩의 일탈을 하면서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삶들과 마주해보고 싶다. 막살고 싶은 게 아라 도전적으로 열심히 살고 싶은 거다. 젊을 때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때보다는 더 많은 걸 경험했고, 조금 더 뻔뻔해진 '나' 이기에 더 쉬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삶은 어차피 벗어날 수 없는 그물 안에 있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더 안정적인 삶도, 더 고통스러운 삶도 모두 인생이고 삶이고 아름다운 것이다. 정답은 없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우는 것이 슈타인의 지난 고통과 니나의 엄청난 이별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그리고 축축하고 촘촘한 회색빛 그물에 얽혀 있듯 자신의 운명에 얽혀 있는 인간들 때문에 우는 것이라는 것을. 대체 누가 그 그물을 찢어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설령 그 그물에서 벗어났다 해도 그것은 발치에 걸려 있으며 인간은 그것을 끌고 다닐 수밖에 없다. 그 그물은 아무리 얇아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

 

 

니나와 슈타인의 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다. 니나는 슈타인의 생을, 슈타인은 니나의 생을 인정할 수 없었지만, 서로의 존재가 없었다면 그들은 삶의 원동력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서로 사랑해서 불행했지만, 그래서 그들은 행복했고 순간순간 삶을 살아낼 수 있었으리라.

 

 

" 나는 이런 아름다운 만남을 선사한 인생에 감사한다." 

 

 

슈타인의 마지막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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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혹시 한 마리 새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 고양이, 말똥가리, 담비, 어린 학생들, 겨울 추위, 이 모두가 그를 쫓고 있어. 새는 이런 한가운데에 살면서 새끼들을 키우고 있어. 한순간도 나뭇가지에서 마음 놓고 앉아 있지 못하지. 그래, 새를 봐, 새가 어떻게 앉아 있는지를 봐. 달아날 준비를 하고, 경계를 하면서, 불안해하면서 나뭇가지에 앉아 있잖아. 그리고 온 세상이 그를 적으로 보는데 노래 부르는 거야."

 

 

이 부분은 내가 날아가는 새를 동경하게 만들어 주었다. 불안한 삶 가운데 순응하며 살아가는 그것들...... 위험 속에서도 새끼들을 키우는 열심과 부지런함...... 모두가 적인 듯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는 그것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불안과 공포, 절망과 슬픔으로 인해 주어진 인생을 맘껏 즐기거나 노래하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들...... 삶 한가운데 서서 뭔가 완벽한 상황을 만들어 행복하려고 하지만 끝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들보다 더 낫지 않은가?

 

<삶의 한가운데>, 이 아름다운 한 권의 책은 나의 마음을 끊임없이 두드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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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실천문학사>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는 인간의 삶, 그것은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연습'이다. <작가의 말 中>

 

 

◑ 인간 연습

 

단 한 번뿐인 인간의 삶. 그 짧은 과정에서 연습을 제하고 나면, 실전으로 살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될까? 아니 그런 완전한 삶을 살 수는 있는 걸까? 연습만 하다 가버리는 인생은 너무 비참하고 슬프지 않을까? 내게 '인간 연습'이라는 말은 다소 혼란스러웠다.

 

이 책의 주인공 윤혁과 그의 친구 박동건. 이 둘은 남파간첩이다.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남조선에 침투해왔다가 체포되어, 30년 간 감옥살이와 모진 고문으로 고통받고 강제전향을 당하게 된다. 이 소설은 출소 이후 그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박동건

 

"이거 우리 헛산 것 아니오?"

 

사상의 조국으로 믿었던 쏘련의 붕괴와 굶주리고 있는 북의 참상을 알게 된 그는, 그렇게 한 시대를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살아온 아무 보람도 성과도 없이 무너져간다. 그뿐인가, 무일푼에 불명예, 연좌제로 인한 가족들의 고통과 그들의 외면......

혁명의 순결을 지키려고 버틴 30년의 옥살이였지만 강제로 전향을 당한 그는 비 전향한 사회주의의 영웅도, 자진 전향하여 자본주의의 물결에 순응하지도 않은 채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의 삶은 연습이었나. 실전이었나? 살고보니 사회주의는 몰락했고, 살고 보니 가족들은 떠나갔고, 살고 보니 몸은 병들어 있었다. 살아보니 그제야 알았다. 연습하고 살 시간이 없었던 거다. 박동건. 그의 열정적이었던 삶의 흔적은 시대의 거센 파도와 같은 흐름 속에서 물거품으로 사라져 갔다.

 

 

 

◑ 윤혁

 

"못 믿긴요. 하도 기막히고 창피스러워 할 말이 없는 거지요."

 

출소했지만 경찰에게 보호관찰을 받으며 제2의 감옥이나 다름없이 생활하고 있는 윤혁은 자신의 죽음과도 같은 박동건을 보내고 어지럼증이 다시 찾아온다. 꼿꼿했던 그의 신념이 일개 형사의 말을 수긍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비참함으로 바뀌게 된 현실에 그는 슬픔을 느낀다. 희생적이었던 당원, 열성적이었던 인민들의 타락과 나태는 그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현실이었다. 그가 살았던 삶은 성공적인 삶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박동건을 잡아간 절망에서 자신을 구해낸 것은 이 아이들이 발휘해온 마력의 덕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박동건에게도 이런 아이들을 갖게 해 줄 것을..... 뒤늦은 후회가 일었다.'

 

그 침울한 시기를 살아갈 수 있게 해 준 것은 바로 경희와 기준이다. 부모를 잃고 불우하게 살던 그들은 윤혁의 도움으로 소년소녀가장들을 돌봐주는 제도의 보호 아래 있게 된다. 그의 집을 자주 찾아와 밥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고 하면서 칙칙한 안개 속 같은 그의 삶은 햇살 그득한 날도 있게 된다. 이것은 박동건에게는 없었던 윤혁의 삶의 원동력이었다.

 

 

'자신이 어느 한 가닥이라도 필요한 존재라는 것, 그것은 큰 위안이 아닐 수 없었다.'

 

감옥에 함께 있었던 강민규라는 젊은이. 운동권에 몸 담고 있으면서 윤혁에게 번역일을 가져다 주며 생계를 도와주고 있다. 윤혁은 번역일을 하면서 지적인 자존심을 세울 수 있고, 생계를 유지할 수도 있으며,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생산적인 일이기에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인간......,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어디까지를 믿을 수 있는 존재인가. 인간의 이성이란 본능을 이길 수 없고, 그것이 인간의 한계 아닐까. 그 인간의 한계가 사회주의 몰락의 절대 원인은 아닐까...... '

 

윤혁은 사회주의 붕괴에 대한 의문과 회의의 수렁 속에서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이어가며 인간에 대한 불신과 혐오로 괴로워한다. 비전향 장기수 북송이나 남북정상회담이 언급되어지는 등 시대는 물결치듯 변하게 된다.

 

 

'수기를 스지 않아서 자기 부정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비록 남다르게 이룩한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인생이었을지 모르나 자기 스스로를 부정해야 하는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 그건 마지막 남은 한 가닥 자존심이었다.'

 

시대의 흐름과 함께 강민규의 권유로 자신의 수기를 쓰게 되는 윤혁. 수기를 쓰면서 독방 공포증, 악몽, 환청, 고문, 자살, 정신신경증......, 그리고 강제전향의 치욕스러웠던 감방생활을 오롯이 다시 마주하게 된다. 책이 출판된 후 윤혁은 예상치 못한 감동을 느끼게 되고, 그 수기는 최선숙이라는 한 보육원 원장과의 인연을 맺어준다. 그는 보육원으로 살림을 옮기고, 그곳에서 일을 도우며 살게 된다. 물론 경희와 기준이도 함께.

 

 

"여긴 인간의 꽃밭이야. 아이들이 나한테 즐거움을 주고 삶의 의욕을 주니 나도 애들을 위해 무슨일이든 하고 싶은 거야. 그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인간에 대해 불신과 혐오로 괴로워하던 윤혁이 인간의 꽃밭이란 말을 하며 웃고 있다.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회복해가며 새로운 삶을 가꾸어나가는 것이다. 윤혁은 인간의 불완전함, 사회주의의 불안전함, 자신의 선택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그 실패의 연습을 딛고 짧지만 조금 더 나은 삶을 살다가 갈 것이다.

 

 

 

 

박동건의 삶은?  의지가 되어 준 두 송이의 꽃 경희와 기준이도, 정신적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는 강민규도, 존경과 사랑의 눈길을 보내는 여인도 없었다. 다시 일어설 작은 불씨도 없었기에 그의 연습은 실전으로 바뀌지 못했다. 그의 인생은 실패작인가?

윤혁의 삶은? 해핑엔딩이기에 그의 젊은 날의 그 모든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는가?  말년의 행복과 그 젊은 날의 무수한 연습을 맞바꿀  가치가 있는 걸까? 인생은 참 수수께끼다. 이해하기 어렵다.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는 인간의 삶, 그것은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연습'이다. <작가의 말 中>

 

 

우리는 인간이지만 인간답게 사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기심과 본능이 이성을 압도하기 때문일거다. 삶은 잘 짜인한 무대의 연극처럼 실수없는 Play를 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우리는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을 매일매일 경험하며 살지 않는가? 그러므로 성공하고 행복한 인생이 완전한 인생은 아닌 것이다. 조금 더 인간답게 살려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삶은 실패를 줄이기 위한 연습이지만, 그 연습조차도 나의 삶의 일부이다. 박동건의 삶이, 윤혁의 젊은 날들이 부정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한 사람의 삶의 가치는 시대적인 운과 개인 배경의 운이 분명히 작용한다. 운칠기삼이란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닐 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말 소중하고 중요한 것을 볼 수 있는 눈이다. 나의 선택이 성공,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일 수 있지만, 그것이 그 시대 그 상황에서 최선이라면......, 악한 것이 아니라면......, 나의 이기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잘한 선택이 아닐까.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향해 조심스럽게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그 과정이 나의 삶 자체가 아닐까. 작가의 말을 다시 읽어보니 이렇게 이해되어진다.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는 인간의 삶 =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연습 = 아름다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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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아인북스_김상열 엮음>구판 절판  //  <2014, 아인북스_김상열 엮음>개정판






내가 읽은 책은 구판<홀로 있을 때조차 신중하라>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 제목이 더 깊이가 있어 보인다.

책의 부제와 같은 '내 삶을 뒤흔든 옛 성현의 한마디' 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조선 최고의 3대 성현인 다산 정약용, 퇴계 이황, 율곡 이이의 가르침 중 선별하여 정리해 놓은 책이다.

세 분 모두, 우리나라 지폐에 있는 인물들이니 얼마나 그 인생이 모범적이었을까? 감히 상상조차 못하겠다.

각 성현의 가르침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구별되어 있다. 글을 읽어나가면서 어렴풋하게나마 그들의 성품이나, 성격, 생활이 어떠했으리라 조금의 '감'이 오는 듯 하다. 비슷한 듯 하지만 조금씩 다른 느낌이다.

 

많은 가르침 중, 요즘 나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에 대한 답을 주었던 '내 삶을 뒤흔든 옛 성현의 몇 마디'를 다시 새겨본다.



○ 다산 정약용


밤 한 톨의 욕심도 버려라


다산 스승이 우연히 숲길을 거닐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 아이는 숨이 넘어갈 듯 울어대며 참새처럼 팔딱팔딱 뛰고 있었다. 선생은 그를 볼 때 마치 '여러 송곳으로 뼛속을 찌르는 듯, 방망이로 심장을 마구 두들겨 맞는 듯 비참하고 절박한 것이, 잠깐 사이에 목숨이 꼭 끊어질 것 같은 모습'이라고 표현했다. 이유인 즉슨, 주운 밤 한 톨을 누가 빼앗아갔기 때문이다.


아아, 세상에 이 아이처럼 울지 않고 권세를 잃은 사람들, 재화를 손해 본 사람들과 자손을 잃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사람들도 달관한 경지에서 내려다보면 모두 밤 한 톨로 울고 웃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


어린아이에게 밤 한 톨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저리 울까? 아이의 시각으로 보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별게 아니라는 걸 우린 알고 있다. 하나라도 더 얻으려고 발버둥치고, 손해보는 듯 하여 괴롭고, 뜻대로 되지 않아 심장이 벌렁벌렁 하는 그 모든 것들의 원인은 욕심이다. 그러나 인생을 길게 본다면 사실 그것은 '밤 한 톨'과 같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사소한 것에 욕심부리지 말자. 밤 한 톨에 울고 웃는 철없는 사람은 되지 말자. 다 별거 아니다.



○ 율곡 이이


|어떤 사람이 졸장부인가


율곡 스승의 이 글에는 졸장부의 나쁜 버릇들을 이야기하며 이를 뿌리채 없애야 할 것을 강조한다.


오늘 한 일은 내일 고치기 어려우며, 아침에는 지난 행실을 후회해도 저녁이면 다시 되풀이된다. 모름지기 용맹스럽게 행동하고 뜻을 크게 펴서 한칼로 나무를 뿌리째 끊어 버리듯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라. 거기에 늘 간절히 반성하는 노력을 더하여, 마음에 한 점 더러운 때가 없게 한 후에야 학문을 이야기 할 수 있으리라.


내가 좋아하는 것이 하늘의 뜻과 순리에 맞지 않는다면, 그것을 완전히 끊어 버리는 결단성이 필요하다. 좋지 않은 생각이나 욕심도 마찬가지다. 망설이거나 고민하거나 미련을 가져서는 안된다. 모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그 싹부터 없애는 게 상책이다. 그렇지 않으면 스멀스멀 다시 고개를 내민다. '단칼에 베어버리기' 이 얼마나 어려운 것일까. 모 아니면 도이다. 없애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매일매일 '나를 점검'해야 하는 이유이다.


생각을 멈추지 마라


게으르지 않고 바쁘게 살면 결코 못된 마음이 일어나지 못한다. 생각하는 일을 멈추지 마라 !


일은 반드시 합당하고 순리에 맞게 처리할 것을 생각하라. 그러기 위해선 글을 읽어야 한다. 글을 읽으면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지혜를 터득하고, 그 지혜를 일속에서 써먹을 줄 알아야 한다. 만약 일의 잘잘못을 가리지 않거나 일은 않고 그저 책만 읽는다면 그 학문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책을 깊게 읽고 배우며, 그 가운데서 지혜와 이치를 터득하고, 그 이치로 세상을 바르게 산다면 마음에 근심없이 욕심없이 착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근본이 이다. 훌륭한 사람들이 쓴 책을 꼼꼼하게 읽고, 탐구와 사색을 통해 이치를 깨닫고, 그리고 나에게 적용하여 실행하고 반성하는 것. 그것이 잘 사는것이다.



○ 퇴계 이황


|배움은 죽을 때 까지 해야 한다.


퇴계 스승도 율곡 스승과 마찬가지로 배움은 죽을 때까지 해야하는 것이니 꾸준히 할 것을 강조 또 강조한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도 욕심은 넣어 두어야 하나보다.


책을 읽어도 마음을 괴롭힐 정도로는 읽지 말 것이며, 너무 집착하거나 마음을 얽매어 무조건 빠른 효과를 거두려 해서는 안된다.


인간의 마음이란 붙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도망쳐 없어지는 법이다. 공부만을 무작정 생각하지 말고, 평상시의 명백한 곳에 눈을 두고 마음을 여유있게 가지면서 이 속에서 한가롭고 편안히 쉴 필요도 있다.


|길은 어디에나 열려있다.  


궁리하는 사물이 복잡하고 어려워서 힘껏 탐구해도 통찰할 수 없거나, 내 모든 재주로는 이를 밝히지 못해 억지로 터득하기 어려운 경우라면, 우선 그 일을 놓아두고 다른 것을 궁리해야 한다. 이렇게 이 일 저 일 궁리하는 가운데 오랫동안 쌓고 깊이 익히면 자연히 마음이 점점 밝아지고 진리가 눈앞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요즘 많이 경험하는 일인데, 책을 읽고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거나 이해가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 그래서 몇 번이고 읽어보곤 한다.

그러나 조급해 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궁리하다 풀리지 않으면 그만 두라는 것이 아니다. 다른 책을 읽으며 또 다른 이치를 깨닫는 과정과, 살면서 얻어지는 다양한 경험으로 인해 어느 순간 그 풀리지 않던 것이 깨달아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공부는 평생 하는 것이고 그 길은 언제 어디에나 열려있는 것이 아닌가?




세 성현의 가르침은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지만 그 중심에 흐르는 줄기는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현시대는 분명 혼란스러운 시대이다. 크고 작은 이기심과 욕심에 물들어 사람됨의 기본을 소홀히하고 있으며, 잘못된 정보와 말들에 현혹된 사람들은 무지한 지성으로 무장한 채 뽐내려고만 하고 있다. 이런한 부끄러운 상황들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개개인의 바른 정신과 깊은 성찰이 선행되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만물의 이치를 깨닫는데 힘을 쓰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할 수 밖에 없어 보인다. 인문학이 무시되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


 

 

 

 

<1988.12  해냄출판> 구판 절판

 


충격적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여러 가지 감정들은 순간순간 내 가슴을 옥죄어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운전 중이던 한 남자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는다. 평소 눈에 아무 질병이 없던 건강한 남자가 말이다. 이어 그를 집까지 데려다준자동차 도둑, 그가 찾아간 병원의 안과의사, 그 안과에 다녔던 검은 색안경을 쓴 여자, 사시증상이 있는 남자아이, 백내장 제거 수술을 앞두고 있었던 검은 안대를 한 노인, 실명한 남자의 아내 등등 차례차례로 실명이 된다.

마치 전염병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각 장애의 증상은 앞이 온통 검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다르게 그들은 모든 것이 백색으로 보이는 백색 실명을 경험하게 된다.

 

우연히 책을 읽던 중, 중국 우한 폐렴, 코로나 바이러스가 이 지구에 창궐하고 있다. 발생지 중국의 피해상황은 말할 수 없이 참담하다. 우리나라도 긴장상태다. 우한 교민들은 한 숙소에 머무르면서 격리되어 있고, 확진자들은 고통 속에서 치료받고 있다. 접촉자들은 불안하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으며, 시민들은 초초와 공포 속에 일상생활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와중에 마스크 사재기 등 몰상식한 사람들의 행동이 드러나고 있으며, 손소독제 품귀현상, 인종차별, 우왕좌왕하는 중국 정부 등 혼란의 혼란을 경험하고 있는 요즈음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과 질병에 대한 경각심 고취 등으로 어려운 시기를 함께 잘 이겨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런 현실과 맞물려, 이 말도 안 되는 설정의 이야기는 더 공포스럽고 현실감 있게 내게 다가왔다.

실명한 사람들은 한 기관에 수용된다. 아이러니하게 그곳은 정신병동이었다. 처음에는 정부가 식량을 제때 제공해 주고 잘 보살펴 줄 것 같았지만, 접촉을 두려 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그들의 안위를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오히려 탈출 시도를 하는 사람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그들은 더 이상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벌레 취급당한다.

 

앞을 못 보는 그들이 수용소 안에서 겪었을 생활이 어떠했을까 짐작해 보라!

부족한 식량으로 인한 배고픔, 아무 곳에나 배변하여 그것들을 밟고 다니며, 씻지 못하여 더럽고, 상처가 나거나 아파도 치료받을 수 없어 죽을 수밖에 없는 극한의 상황.

 

수용소 안에는 점점 많은 무리들이 들어오고, 그중 총을 가진 한 남자가 독재자처럼 그곳을 통치하고자 한다. 식량을 독점하고, 돈이 될 것 같은 귀중품들을 약탈하고, 먹을 것을 빌미로 성욕을 채울 여자들을 요구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동일하게 볼 수 없는 눈먼 자들의 도시에도 강자와 약자, 부조리함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씁쓸했다.

 

작가의 놀라운 설정은 바로 과의사의 부인이다모두 볼 수 없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존재. 수용소로 가게 된 남편을 보호하고자 실명인 척하고 함께 따라가게 되는 그녀.

 

인간의 존엄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수용소 생활.

것을 두 눈으로 오롯이 지켜보는 것은 그녀에게는 축복이 아닌 더 큰 괴로움과 불행이었다. 그녀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그녀 방에 함께 수용된 사람들을 돕는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총을 가진 독재자를 가위로 살인하게 되는 끔찍한 일도 저지르게 된다.  

 

수용소 안에 있던 한 여자의 방화로 수용소에 불이 나게 되고, 몇몇 사람들은 그곳을 탈출한다. 그러나 이미 도시 전체는 모든 사람들이 눈먼 죽은 도시였다. 그 아비규환 속에서 살 길을 터득하고 살고 있는 귀신과 같은 사람들.

 

의사 아내가 이끄는 일곱 명의 무리는, 겉모습은 볼 수 없지만 생존을 위해 함께 나누는 그 과정에서 서로서로에게 진정한 인간의 따스함을 느끼게 된다. 

 

스토리는 무겁지만 흥미진진했고, 생략된 문장부호로 인해 누가 한 말인지 세심하게 신경 써야  했지만 덕분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를 명쾌하게 해석하는 것이 내게는 너무 어려웠다. 뒤에 부록처럼 있는 해설의 내용을 몇 차례 읽어보았다.

 

 

'눈이 멀었다'라는 사실은 사실상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눈이 멀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많은 것을 잃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실제 소유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기본적인 생존 양식으로 우리는 일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와 존재를 확인한다. 그러나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에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었을 때에야 가지고 있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해설 사라마구의 따뜻한 시선> 中_ 김용재 교수

 

 

사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이름이 없다. 단지 안과의사, 그의 아내, 선글라스를 낀 여인, 사팔뜨기 소년 등으로 불릴 뿐이다. 우리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늘 하며 살아간다. 이름, 가족, 직업, 재산과 명예, 학력, 외모 등으로 말이다. 모두가 실명된 도시라면 이 모든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간의 정체성은 이런 보이는 것들이 아닌 것이다. '그 마음이 담고 있는 것'이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것이 선일 수도 악일 수도 있는.......

 

마지막에 한 사람씩 다시 시력이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고 모두 감동적인 순간을 맞이한다. 의사의 아내는 의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내가 눈 뜨고 살아가면서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봐야 할 것은 보지 않고, 보지 말아야 할 것만을 보고 집중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볼 수는 있지만, 눈먼 사람이 되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할 것 같다.

 

 

 

 

 

 

 

 

 

 

 

 

<<1998. 10. 양피지>

 

 


 

이 책 안의 시들은, 시라고 느껴지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편지인 듯한 느낌이다.

이 시를 베껴 사랑고백을 했다는 독자 이야기가 공감이 된다.

하나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듯한 구성은 읽는 재미를 주며,

문득문득 연애시절의 풋풋함과 서투름이 기억나 미소가 머금어지기도 했다.

 

 

*

 

 

1부 그림움을 벗어 놓고

 

 

첫 만남 - 함께하면 좋은 사람 - 첫 입맞춤 - 포옹 - 첫날밤 - 사랑이라는 말 - 나의 사랑하는 사람아 - 그대가 보고픈 날 - 그리움을 벗어놓고 - 아픔 - 밀려드는 그리움 - 그대가 내 앞에 서 있던 날 -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 사랑 속에 빠져있을 때 - 흐르지 못하는 사랑

 

1부의 제목들을 연이어 읽어보면 사랑에 빠진 한 사람의 감정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중, 좋았던 한 시의 구절이다.

 

 

삶이란 바다에

잔잔한 파도가 치고 있다는 것이다.

.....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삶의 울타리 안에

평안함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삶이란 들판에

거세지 않게 잔잔히 흔들어 놓는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이다.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中

 

 

*

 

 

2부 내 마음의 유리창

 

 

계절이 지날 때마다

그리움을 마구 풀어놓으면

 

봄에는

꽃으로 피어나고

여름엔

비가 되어 쏟아져 내리고

가을에는

오색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겨울에는 눈이 되어 펑펑 쏟아져 내리며

내게로 오는 그대

 

<계절이 지날 때마다>中

 

 

*

 

 

3부 나무의자

 

3부는 삶과 죽음,

인간의 고뇌 등을 느낄 수 있는 시들 그리고 어머니와 어린 시절 추억 이야기이다.

 

 

시체는 축 늘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사는 순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죽음을 향한 질주였다

한 순간을 자극하는 쾌락이 가져오는

죽음의 손길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나에게만은 비켜가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오토바이 충돌사고>中

 

 

*

 

 

4부 두 손 모아 주님께 기도를

 

4부에서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픈 시인의 고백이다.

그중, <아름다운 황혼 같은 죽음>이란 시는 눈물 나도록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황혼 같은 죽음>

 

검은 머리 하나 없이

하얗게 퇴색되도록 살았어도

아무런 후회 없이 살아온 노인이

죽음의 길을 떠나며

평생을 동고동락한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

 

"여보!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아내를 바라보며

주기도문을 같이 외우자던 노인은

죽음이라는 잠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황혼 같은

죽음이었습니다.

 

 

*

 

 

시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해석할 필요도 없다.

편안하게,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따뜻하고 공감 가는 이야기들이다.

 

오랜만에 편안한 책 한 권을 읽은 듯하다.

 

 

 

***

 

 







이 책을 하루에 서너 편씩 꾸준히 읽었다. Q.T를 하듯이 천천히 시간을 두고 읽으니 좋은 말씀과 가르침이 더 내 맘을 건드린다. 꼭 기억하고 싶은 가르침을 잊지 않도록 기록해 두련다.

 


우리가 살아온 날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그때그때 만나는 이웃들을 어떻게 대했느냐 ! 이다. 나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 이웃과의 관계라고 한다면 난 정말 두려워진다. 순간순간 만나는 이웃들, 직장동료, 친구, 그리고 심지어 가족에게 조차도 친절한 행동, 힘을 주는 말 한마디, 심지어 따뜻한 눈빛조차 거두어 들였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아니 겉으로는 그런 척 하면서 실제 마음은 건성으로 스쳐가듯 대했던 적은 또 어떠하고.

 

어느 날 내가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이 나를 만난 다음에는 사는 일이 더 즐겁고 행복해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을 만난 내 삶도 그만큼 성숙해지고 풍요로워 질 것이다. 명심하고 명심할 일이다._ 법정

 


우리는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항상 배우고 익히며 노력해야 한다. 할 일 없이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사실 나의 바람도 인간답고 품위 있게 남은 삶을 살고 마무리하고 싶다. 그러려면 책을 읽고 생각이 깊어져야 한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법정 스님은 두 번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은 한 번 읽을 가치도 없다고 한다. 정말 그런 것 같다. 좋은 책들은 다시 열어 보게 된다. 세월이 지나도 읽을 때마다 새롭게 배울 수 있는 책, 내 영혼에 자극을 주어 삶의 의미와 기쁨을 안겨주는 그런 책 말이다.

 

법정스님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결혼 주례사에서, 삶의 동반자로서 원활한 대화의 지속을 위해 해야 할 과제를 신혼부부에게 내준다. 이것은 무릎을 탁 칠 정도로 명쾌한 방법인 듯하다.

 

한 달에 산문집 2권과 시집 1권을 밖에서 빌리지 않고 사서 읽는다. 산문집은 신랑 신부가 따로 한권씩 골라서 바꿔가며 읽고 시집은 두 사람이 함께 선택해서 하루 한 차례씩 적당한 시간에 번갈아 가며 낭송한다. 가슴에 녹이 슬면 삶의 리듬을 잃는다. 시를 낭송함으로써 항상 풋풋한 가슴을 지닐 수 있다. 사는 일이 곧 시가 되어야 한다._ 법정

 


간소하게 더 간소하게 살라는 그의 메시지는 책 전체에 흐른다. 이사를 앞두고 필요 없는 물건들을 버리는 중이다. 더 이상 안 볼 것 같은 책들은 중고서점에 팔기도 버리기도 했다. 언젠가는 들여다보겠지 라는 생각으로 모아둔 많은 자료들도 과감히 정리했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오래된 가구들도 선별해 버리려고 한다. 오랜 동안 입지 않은 옷이나 가방들도 버리고 갈 예정이다. 미련 없이. 적게 가지고도 멋있게 살고 싶다.

 

<월든>의 저자인 데이비드 소로우는 여가가 사업만큼이나 중요한 것이고 부자가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거의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즉 사람이 부자이냐 아니냐는 그의 소유물이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 없이도 지내도 되는 물건이 많으냐 적으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는 소유를 극도로 제한했지만 초라한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_법정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면서 사는 것은 지금 현재를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현재를 가치있게 산다는 것은 이웃과 나누며 따뜻한 사람이 되어 주는 것.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 욕심을 버리고 간소하게 사는 것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 미련없이 떠날 수 있게 말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 없이 떨쳐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_ 법정





★★★



 

 

 

 

 


 

 

 

사생활이 잘 알려지지 않은 파트리크 쥐스킨트.

작품 속 인물들로 그의 생각이나 가치관 등을 살짝 엿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에세이는 사랑에 대한 그의 단상을 편안하게 쓴 글이기에, 책을 읽으며 그와 이야기를 하는 느낌이었다. 베일에 싸여있는 쥐스킨트의 속내를 알 수 있는 책이기에 더 의미가 있다.

 

 

 

이 에세이 속에는 플라톤의『향연』, 스탕달의『연애론』, 필리프 아리에스의『죽음 앞에 선 인간』, 괴테의『서동시집』, 리하르트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등 많은 저서들이 인용되고 있다. 쥐스킨트의 그 부러운 박식함으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나간다.

막스 뮐러의 소설 <독일인의 사랑>에서, 한 영혼과 또 다른 영혼의 일치를 느끼는 고귀한 사랑이야기를 정말 감동적으로 읽었었다. 쥐스킨트의 책에서는 그런 종류의 사랑과는 다른 이야기들이 나온다.

흥미롭고 공감 가는 단상들이다.

 

 

 

흥미로운 몇 가지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첫째, 사랑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끔찍한 병!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사랑에 빠진 한 쌍의 연인은 사회적으로 이방인이 되는 경향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둘만의 사랑에 집중하다 보니 주변의 모든 것에 관심이 없고 에로스의 성스러운 광기에 사로잡혀 세상을 무시하는 일이 벌어진다.

사랑이 인간사에서 가장 좋은 것이자 아름다운 것임에도 그 이면에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 수 있다.

사랑은 무엇인가? 선인가 악인가?

 

 

또 하나, <진정한 사랑은 자주, 쉽게, 또 겁없이 죽음을 떠올린다. 죽음을 쉽게 비교의 대상으로 삼고, 죽음을 얻으려면 도대체 얼마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계산하는 것이다.>라는 스탕달의 말처럼 이 책은 사랑에 대한 단상이라기에는 사랑과 죽음을 면밀하게 연관시킨다.

사랑해서 죽음을 선택하는 내용의 문학작품들이 많이 있다. 사랑의 고귀한 완성을 죽음 속에서 찾으려는 거다.

어느 정도 공감이 가기도 하지만, 나는 사랑을 잃었다고 죽을 만큼 무모하지도 용기 있지도 못하다.

 

에로틱한 자극의 절정이라고 생각한 죽음을 실행하고자 연인과의 자살을 시도했던 클라이스트.

삼각관계 속에서 죽음을 선택하여 사랑하는 연인을 죽음 저 이면에서 기다리고자 결심한 베르테르.

사랑과 죽음을 동시에 결합하고자 했던 트리스탄과 이졸데.

모두 사랑의 완성은 죽음이라 여긴 듯한 그들의 결단. 사랑은 과연 죽음과 같은 것일까?

 

 

 

마지막으로 죽은 아내를 살리기 위해 지하세계로 간 오르페우스의 이야기와 나사렛 예수를 비교한 부분은 흥미로웠다. 

오르페우스는 사랑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억울한 죽음을 인정할 수 없어, 단지 정당한 기간의 생명을 연장하고자 하는 소박한 마음으로 지하세계로 간다. 그리고 지하의 신들에게 겸손한 자세로 설득과 부탁을 하게 된다. 오로지 단 한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말이다.

결국엔 실패하는 이 시도는 완전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우리와 비슷하다. 인간적인 사랑은 완전할 수 없다는 의미일까?

 

쥐스킨트는 오르페우스의 사랑을 예수의 그것과 비교한다.

예수는 한 개인이 아니라 아니라 인류 전체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설득의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인 추종을 요구했다. 결국 그는 죽음과 부활로 전 인류를 구원하는 사랑을 이루어 낸다. 나사렛 예수는 결코 실수를 하지 않는다. 그의 사랑과 구원은 오르페우스의 인간적인 에로스와는 다르다.

예수의 사랑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쥐스킨트의 시선이 신선하다.

 

 

 

결국 사랑은 죽음을 통해서 끝나게 되는가 ? 아니면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오히려 사랑과 죽음은 같은 것인가?

지독하게 육체적인 것도 사랑인가? 사랑하는 사람만 보이고 남을 무시하는 것도 사랑인가? 이성의 사랑, 동성의 사랑, 연하의 사랑, 연상의 사랑 등등...... 사랑은 참으로 정의 내리기 어렵게 수많은 모습들로 존재한다. 불완전한 채로 말이다.

사랑을 정의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이 뭐 중요한가? 신이 아닌 우리들은 불완전하고 모순 투성이의 사랑을 할 수밖에 없겠지만, 좀 더 완전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방향을 따라 하루하루 노력하며 사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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