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12 해냄출판> 구판 절판
충격적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여러 가지 감정들은 순간순간 내 가슴을 옥죄어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운전 중이던 한 남자가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는다. 평소 눈에 아무 질병이 없던 건강한 남자가 말이다. 이어 그를 집까지 데려다준자동차 도둑, 그가 찾아간 병원의 안과의사, 그 안과에 다녔던 검은 색안경을 쓴 여자, 사시증상이 있는 남자아이, 백내장 제거 수술을 앞두고 있었던 검은 안대를 한 노인, 실명한 남자의 아내 등등 차례차례로 실명이 된다.
마치 전염병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각 장애의 증상은 앞이 온통 검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다르게 그들은 모든 것이 백색으로 보이는 백색 실명을 경험하게 된다.
우연히 책을 읽던 중, 중국 우한 폐렴, 코로나 바이러스가 이 지구에 창궐하고 있다. 발생지 중국의 피해상황은 말할 수 없이 참담하다. 우리나라도 긴장상태다. 우한 교민들은 한 숙소에 머무르면서 격리되어 있고, 확진자들은 고통 속에서 치료받고 있다. 접촉자들은 불안하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으며, 시민들은 초초와 공포 속에 일상생활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와중에 마스크 사재기 등 몰상식한 사람들의 행동이 드러나고 있으며, 손소독제 품귀현상, 인종차별, 우왕좌왕하는 중국 정부 등 혼란의 혼란을 경험하고 있는 요즈음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과 질병에 대한 경각심 고취 등으로 어려운 시기를 함께 잘 이겨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런 현실과 맞물려, 이 말도 안 되는 설정의 이야기는 더 공포스럽고 현실감 있게 내게 다가왔다.
실명한 사람들은 한 기관에 수용된다. 아이러니하게 그곳은 정신병동이었다. 처음에는 정부가 식량을 제때 제공해 주고 잘 보살펴 줄 것 같았지만, 접촉을 두려 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그들의 안위를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오히려 탈출 시도를 하는 사람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그들은 더 이상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벌레 취급당한다.
앞을 못 보는 그들이 수용소 안에서 겪었을 생활이 어떠했을까 짐작해 보라!
부족한 식량으로 인한 배고픔, 아무 곳에나 배변하여 그것들을 밟고 다니며, 씻지 못하여 더럽고, 상처가 나거나 아파도 치료받을 수 없어 죽을 수밖에 없는 극한의 상황.
수용소 안에는 점점 많은 무리들이 들어오고, 그중 총을 가진 한 남자가 독재자처럼 그곳을 통치하고자 한다. 식량을 독점하고, 돈이 될 것 같은 귀중품들을 약탈하고, 먹을 것을 빌미로 성욕을 채울 여자들을 요구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동일하게 볼 수 없는 눈먼 자들의 도시에도 강자와 약자, 부조리함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씁쓸했다.
작가의 놀라운 설정은 바로 안과의사의 부인이다. 모두 볼 수 없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존재. 수용소로 가게 된 남편을 보호하고자 실명인 척하고 함께 따라가게 되는 그녀.
인간의 존엄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수용소 생활.
그것을 두 눈으로 오롯이 지켜보는 것은 그녀에게는 축복이 아닌 더 큰 괴로움과 불행이었다. 그녀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그녀 방에 함께 수용된 사람들을 돕는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총을 가진 독재자를 가위로 살인하게 되는 끔찍한 일도 저지르게 된다.
수용소 안에 있던 한 여자의 방화로 수용소에 불이 나게 되고, 몇몇 사람들은 그곳을 탈출한다. 그러나 이미 도시 전체는 모든 사람들이 눈먼 죽은 도시였다. 그 아비규환 속에서 살 길을 터득하고 살고 있는 귀신과 같은 사람들.
의사 아내가 이끄는 일곱 명의 무리는, 겉모습은 볼 수 없지만 생존을 위해 함께 나누는 그 과정에서 서로서로에게 진정한 인간의 따스함을 느끼게 된다.
스토리는 무겁지만 흥미진진했고, 생략된 문장부호로 인해 누가 한 말인지 세심하게 신경 써야 했지만 덕분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를 명쾌하게 해석하는 것이 내게는 너무 어려웠다. 뒤에 부록처럼 있는 해설의 내용을 몇 차례 읽어보았다.
'눈이 멀었다'라는 사실은 사실상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눈이 멀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많은 것을 잃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실제 소유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기본적인 생존 양식으로 우리는 일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와 존재를 확인한다. 그러나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에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었을 때에야 가지고 있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해설 사라마구의 따뜻한 시선> 中_ 김용재 교수
사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이름이 없다. 단지 안과의사, 그의 아내, 선글라스를 낀 여인, 사팔뜨기 소년 등으로 불릴 뿐이다. 우리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늘 하며 살아간다. 이름, 가족, 직업, 재산과 명예, 학력, 외모 등으로 말이다. 모두가 실명된 도시라면 이 모든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간의 정체성은 이런 보이는 것들이 아닌 것이다. '그 마음이 담고 있는 것'이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것이 선일 수도 악일 수도 있는.......
마지막에 한 사람씩 다시 시력이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고 모두 감동적인 순간을 맞이한다. 의사의 아내는 의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내가 눈 뜨고 살아가면서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봐야 할 것은 보지 않고, 보지 말아야 할 것만을 보고 집중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볼 수는 있지만, 눈먼 사람이 되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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