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일 출판사_1984, 김은경 옮김>
가지고 있는 책은 오래 전 품절되었을 아주 낡은 책이다. 연필로 가늘게 밑줄이 그어져 있는 곳곳의 흔적을 보며 젊은 시절의 내가 희미하게 기억난다.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고전, 독일인의 사랑. 언어학자로 더 많이 알려진 막스 뮐러의 유일한 소설이다.
|첫번째의 추억 ~ 세번째의 추억
이 세 추억은 '나'의 어린 시절 회상과, 소년이 사랑할 수 있는 최대의 사랑으로 한 소녀를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다. 마리아라는 이름의 그 소녀는 어려서부터 병으로 누워있는 연약하지만 품위있고 고상한 정신을 가진 소녀이다. 소년의 사랑은 청년들, 장년들에게는 보기 어려운 진실성과 순수함 그리고 열정이 있다. 우리는 자라면서 남에게는 예의를 갖추고,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자연스레 익히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더라도 온전히 나를 드러내서는 그 사랑이 깨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소년은 그녀가 남이란 생각에 의문을 품는다. 내 마음 속에 그녀가, 그녀 마음속에는 내가 늘 있는 듯한 감정을 경험한다.
|네번째의 추억 ~ 다섯번째의 추억
학창시절과 대학 초년의 시절을 보내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나'. 그녀를 떠나 있었지만 '나'의 환상 속에서 너무나 커져버린 그녀와의 재회를 하게 된다. 그리고 항상 누워있지만 여전히 고귀하고 아름다운 그녀와 아름다운 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집중하고 있으면 참으로 아름답다. 서로의 생각이 비슷할 뿐더러, 다른 생각들이 있다면 자신의 생각을 부드럽게 전달하며 서로 마음의 상함 없이 깊은 대화를 이어간다.
사실, (연애시절 그러하진 못했지만) 나는 남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다. 자녀들, 책, 종교, 사회적 이슈, 인생, 삶의 가치, 미래 등을 이야기 하는 시간들이 의미 있다. 대화를 하고 나면 새로운 힘이 생기는 듯하다. 거짓 없이 진실 되게 자신들의 생각을 나누며,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더 좋은 길을 찾으려는 시도는 인생을 즐기는 또 다른 매력이다.
|여섯번째의 추억 ~ 일곱번째의 추억
순수하게 사랑하는 그들에게도 사랑의 위기는 찾아온다. 주위의 시선들, 부모의 반대, 마리아의 건강악화 등 순수한 사랑을 가로막는 상황들은 너무나 많다. 사랑하는 데 무슨 조건이 그리도 많은지 도무지 사랑이라는 것을 하는게 예나 지금이나 까다롭다. 그러나 ‘나’는 한 순간을 잃는 것은 영원을 잃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녀를 다시 찾아간다.
“사랑이 무엇일지라도, 마리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마리아, 나는 당신이 나의 것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나는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추억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것이 꼭 육체적인 사랑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서로에게 속해있는 일체감을 느낀다면, 자신과 온전히 일치되는 말들로 이루어진 대화가 통한다면, 서로에게 삶의 희망을 줄 수 있다면..... 영혼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오빠와 누이의 사이 같은 것이든, 아버지와 자식 사이 같은 것이든, 신랑과 신부의 사이 같은 것이든 말이다.
“통계학자의 말에 의하면 매 시간마다 하나의 사랑이 깨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어째서 그럴까요? 그것은 대체로 이 세상이 부부사이의 사랑 외에는 다른 사람들 사이의 사랑을 전혀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생각해 보면, 부부사이의 사랑은 영혼의 사랑을 할 때 깨어지지 않고 영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나의 이웃에게, 또 다른 누군가에게 느끼는 이러한 종류의 사랑도 우리는 ‘사랑’이라 불러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영혼의 사랑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당신은 왜 나를 사랑하죠?” 마리아의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왜냐구요 ? 마리아! 어린 아이에게 왜 태어났느냐고 물어 봐요. 꽃에게 왜 꽃을 피우느냐고 물어 봐요! 태양에게 왜 비추느냐고 물어 봐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야만하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
“마리아, 당신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선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좋아하고, 내가 당신을 좋아하므로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다.”
세상에... 너무 아름답고 진실 된 고백 아닌가! 이런 고백을 받는다면 정말로 행복할 것 같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그날 밤 그녀는 하늘로 떠나간다. 그 후, 몇 해가 흘러갔지만 그녀의 사랑은 여전히 그에게 머무른다. 그 사랑의 경험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며 살게 되지만, 오롯이 혼자임을 느끼는 그런 날에...... ‘나’는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의 회상으로 물들게 된다.
‘요즘에 이런 사랑이 어디 있을까? 성경이나 고전에만 가능한 이야기’ 라는 말에 난 동의하지 않는다. 이렇게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은 이 세상 곳곳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아무 욕심 없이, 비교 없이, 순수하게 사랑하는 그 일치감. 그 한 방울의 사랑이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는 놀라움. 독일인의 사랑은 세상을 살아가며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준 아름다운 책이다.
|||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상에세이] 아름다운 마무리_법정 (0) | 2020.01.27 |
---|---|
[독일에세이] 사랑을 생각하다_파트리크 쥐스킨트 (0) | 2020.01.27 |
[영미소설] 기억전달자_로이스 로리 (0) | 2020.01.20 |
[프랑스 에세이] 섬_장그르니에 (0) | 2020.01.17 |
[교양 인문학] 아픔이 길이 되려면_김승섭 (0) | 2020.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