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꽃과 함께 봄을 알리는 노오란 산수유 꽃.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산수유의 성실함에 매료된다.

 

 

모진 겨울을 이겨낸 나무는 초록의 잎보다 먼저 수수만한 작은 알갱이들을 피워낸다.

 

 

 

 

우산살 모양의 꽃차례에 수십 개의 여린 몽우리가 터질 준비를 하며 매달려 있다.

 

 

 

 

벼랑 위, 아름다운 방화수류정을 가리지 않는 산수유의 배려도 좋다. 서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따뜻한 남쪽, 산수유가 만발했다는 소식에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그러나 성실한 꽃들은 이곳에서도 하루하루 계절을 이겨내며 소박하고 신비롭게 피어날 것이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김훈 <자전거 여행>

 

 

김훈의 시선에 담긴 산수유는 눈물겹게 아름답다.

소박하며 초라하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우리네 인생과 닮은 듯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꽃이다.

 

노오란 꽃이 무사히 피어나길 응원하며 다시 하루를, 한 주를, 봄을 시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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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생일이 또 한 번 지나간다.

 

이번 생일에는 남편 덕에 좋아하는 갈치조림을 배불리 먹었고, 오래전부터 하나 있었으면 했던 14K 링 귀걸이도 생겼다.

딸은 좋아하는 드라이플라워 목화 꽃다발을 들고 들어왔다. 꽃말이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했더니 그건 몰랐다고 했다. 케이크로 유명한 카페에서 싱싱한 딸기가 잔뜩 올려진 쵸코 케이크를 구입해 나이만큼 초를 꽃아 주었다. 미역국은 먹어야 한다며 미역을 참기름으로 달달 볶아 푹 끓여 한 그릇 떠다 주었다. 아들은 근무 전, 생일 축하한다는 밝은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정말 모두 감동이었다. 

 

 

 

 

 

이제는 나이에 더하기를 하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세월을 무사히 살아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 모든 일들을 기억할 순 없지만, 경험으로 얻고 깨달은 것들, 쌓여가는 가슴 찡한 추억,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들이 나를 더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드디어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감상했다.

주인공(윤정희)의 뛰어난 연기에 심하게 감정이입이 되었다. 

 

주인공은 요양보호사 일을 하며, 이혼 후 멀리서 일하는 딸을 대신해 손자와 둘이 어렵게 살아가는 66세 노인이다. 기억과 인지기능에 문제가 있는 알츠하이머 병을 앓고 있지만, 멋을 부릴 줄 알고 꽃도 좋아하는 소녀 같은 감성을 가졌다. 간절히 시를 쓰고 싶어 문화원에서 시 창작 수업을 들으며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유심히 보고 관찰하지만 시상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던 중, 요양 보호사로 일하다 당한 수모, 여고생 희진이의 자살, 그 사건에 연루된 자신의 손자, 죄를 묻으려 했던 부모들의 뻔뻔함 등을 겪으며 그녀를 둘러싼 현실의 고통과 아픔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살구는 스스로 땅에 몸을 던진다 깨여지고 밟힌다 다음 생을 위해

 

그녀의 노트에 적힌 메모처럼, 고통 속에서 진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그녀는 희진이를 추모하며 아름답고 긴 시를 쓸 수 있게 된다. 괴로움 가운데 그녀는 비로소 시인이 된다.

 

 

문화원 수강생들이 '내 인생에 아름다웠던 순간'에 대한 기억을 발표하는 시간.

그 순간들을 이야기하며 모두 눈가에 눈시울이 맺힌다. 나의 일들을 잠시 생각해 보니 어김없이 가슴이 옥죄어 오고 목이 멘다. 고통 끝에 온 행복이어서인지, 찰나의 행복 뒤에 괴로움이 생각나서인지, 아름다운 순간은 그냥 슬픔인 건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밝고 화려해 보이는 아름다움보다 슬픔을 간직한 것들은 더 아름답다.

슬프게 아름답다는 말이 주는 의미가 또렷해진다.

 

그러니 인생은 괴롭고 슬프지만 아름다운 것이고, 아름답지만 고통스럽기도 아프기도 한 것이다. 

최은영 작가의 소설 <내게 무해한 사람>에 나오는 표현 '따뜻한 온도에서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

그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번의 생일이 그렇게 지나간다. 아름답지만 슬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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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새해, 그리고 아들의 생일.

 

 

 

본인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 해를 자신의 생일로 시작하는 것도 꽤 의미 있는 일인 것 같다.

아들은 없지만 집에 있는 재료들로 간단한 케이크를 만들어 보았다.

 

무척이나 소식이 궁금했는데, 이 날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예비 근무로 여유가 있는 날이란다.

미역국은 아니지만 떡국은 먹었단다.

 

 

 

 

그냥 지나기 아쉬워 보내 준 소박한 생일선물도 받았단다.

지난번 통화 시 아팠다고 했던 곳은 아무렇지 않게 다 나았단다.

어깨에 초록 견장을 달고 진급했다는 소식도 전했다.

2~3월 중 또 한 번의 휴가가 있을지 모른다고도 했다.

햇살이 넘치는 날씨에 절로 기분도 좋다며 엄마 아빠를 안심시켜주는 아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을 그대로 믿진 않는다.

수많은 무소식의 시간들 사이, 인내로 헤쳐나간 일들이 왜 없겠는가?

 

간신히 마음을 추스려 정신 차리고 보니 소식 전할 여유가 생기기도 하겠고, 또다시 감정을 추스리기 어려워 연락을 머뭇거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애틋한 사랑으로 '무소식은 희소식'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목소리를 듣거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그지없이 반갑고 좋다.

 

 

 

 

딸은 반가운 얼굴로 소식을 전했다.

기숙사에서 2주만이다. 룸메들과 잘 어울리며 연말을 보내고 온 딸아이가 기특했다.

어딘가 모르게 조금 성숙해져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궁금하다고 여러 가지를 캐묻는 시기는 지난 듯하여 소나기 같은 질문 공세는 하지 않게 된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인생을 배우고 있을 두 자녀. 

그저 건강한 목소리를 듣고, 편안한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좋은 그런 새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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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의 마지막 날. 운 좋게 하루 휴가.

평일, 온전히 나만의 하루를 갖는다는 것이 정말 소중하다.

 

올 초, 딸의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 입학의 대단한 일이 마무리되고, 삼척으로 온 가족 여행.

아들의 군입대와 GOP 자대 배치 후 근심의 나날들이 지나가고, 어느 정도 안정적인 일상.

 

지겹도록 계속되는 코로나 속에서 남편과 나는 벗어나지 못하는 틀 안을 돌고 돌듯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계획했던 자격증을 하나 취득했지만 별다르게 활용하지는 못하고 있다.

 

외줄을 타듯 위태로왔던 순간도, 가슴 아린 일들도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또 별거 아니다.

 

딸과 두어번의 짧은 여행과, 남편과 주말 데이트를 하며 가능한 찰나를 즐기려 애썼고, 자족하며 즐겁게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가끔 잘 되지 않았지만.

 

 

 

 

 

 

일 년간 읽었던 도서목록을 정리해 보니 권 수가 작년에 못 미친다. 초반에 치뤘던 큰 일들로 나의 정신을 빼앗긴 모양이다. 또 한 가지 핑계를 대자면, 책을 연속으로 두 번 읽는 습관이 생겼다. 몇 권을 제외하고는 다 그렇다. 다독보다는 정독의 매력에 빠져있지만, 정독하며 다독을 하고 싶은 욕심도 생긴다. 

 

 

Jan.
    1.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_귀욤뮈소
    2. 삶의 한가운데_ 루이제 린저
Feb.
     3. 바다의 기별_김훈
 Mar.
     4.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_이도우
     5. 구해줘_ 기욤뮈소
     6. 책은 도끼다-박웅현
Apr.
    6.  화장_김훈
    7.  달러구트의 꿈 백화점_이미예
    8. 인생은 소설이다_기욤뮈소
    9. 수상한 고물상, 행복을 팝니다_이서윤
May
   10. 세상끝의 카페_존 스트레레키
   11. 안나카레리나 1_레프 톨스토이
June
   12. 나는 나답게 살기로했다_손힘찬
   13. 28_정유정
July
   14. 나를 견디는 시간_이윤주
   15. 7년의 밤_ 정유정
   16. 그리움의 문장들_림태주
   17. 종의 기원_정유정
Aug.
   18. 쇼코의 미소_최은영
   19. 어젯밤_제임스 설터
   20. 안나카레리나 2_레프 톨스토이
Sep.
   21.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_이도우
   22. 월플라워_스티븐 크보스키
   23. 두 번째 지구는 없다_ 타일러 라쉬
   24. 죽고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_백세희
Oct.
   25. 내게 무해한 사람_최은영
   26. 어린이라는 세계_김소영
Nov.
   27. 토니 다키타니_무리카미 하루키
   28. 정체성_밀란쿤데라
   29.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_신형철
Dec.
  30. 안나카레리나 3_레프 톨스토이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상당히 많이 봤다. 
왓챠와 네플릭스 구독이 한 몫 했고, 코로나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서이기도 하겠다.
 
 
 
1. 영웅본색 / 2. 흐르는 강물처럼 / 3.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 4. 라디오스타 / 5. 먹고 사랑하고 기도하라 / 6. 안나 카레니나(2002) / 7. 화차 / 8. 워킹홀리데이 / 9. 김종욱 찾기 / 10. 올리브 키터리지 / 11. 아가씨 / 12. 가족의 탄생 / 13. 센스 앤 샌서빌리티 / 14. 미드나잇 인 파리 / 15. 은교 / 16. 화양연화 / 17. 세렌디피티 / 18. 화장 / 19. 원더풀 라이프 / 20. 러브 액추얼리 / 21. 무뢰한 / 22. 해피투게더 / 23. 아비정전 / 24. 박하사탕 / 25. 연애소설 / 26. 보이후드 / 27. 퐁네프의 연인들 / 28. 친절한 금자 씨 / 29.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 / 30. 오 수정 / 31. 안나 카레니나(1997) / 32. 연애의 온도 / 33. 택시 드라이버(1976) / 34. 동사서독 리딕스 / 35. 이터널 선샤인 / 36. 우리 집 / 37. 도둑들 / 38. 갓 오브 시티 / 39. 작업의 정석 / 40. 우리들 / 41. 월플라워 / 42. 극비수사 / 43. 엽기적인 그녀 / 44. 위대한 유산(1946) / 45. 번지점프를 하다 / 46.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 47. 버닝 / 48. 투캅스 / 49. 보통사람 / 50. 담보 / 51. 베를린 / 52. 재심 / 53. 비포 위 고 / 54. 어린 의뢰인 / 55. 초록물고기 / 56. 클로저 / 57. 토니 타키타니 / 58. 혜화, 동 / 59. 비포 선라이즈 / 60. 악질 경찰 / 61.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62. 안나 카레니나(1948) / 63. 어바웃 타임 / 64. 노트북 / 65. 러브레터 / 66. 브릿지 존스의 일기 / 67. 기적 / 68. 모가디슈 / 69. 침묵 / 70. 가장 따뜻한 색, 블루 / 71. 시스터

 

 

수많은 영화가 좋았지만 그중, <보이후드>와 <어바웃 타임>은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영화인 듯하다. 영화를 보다 감정이 격해지며 왈칵 눈물이 나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 본 레아 세두 주연의 영화 <시스터>도 짠한 여운이 남는 영화다.

스위스 설원의 아름다운 배경과 두 주인공의 우울함은 보는 내내 대비를 이루며 마음을 아프게 했다.

배우들의 소름 끼치는 연기가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책과 영화에서 인생을 배운다. 위로를 받기도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 

 

 

다가오는 2022년에 벌어질 일들이 두렵기도 기대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남편이 삶의 짐을 조금 내려놓고 평안한 마음으로 지냈으면 좋겠다. 

지루한 일상의 틀을 깰 수 있는 다양한 기회가 다가온다면 용기 내어 잡을 것이다.

아들의 무사 제대, 딸의 눈부신 도전들을 응원한다.

 

역시나 좋을 것이다. 2022년도.

 

늘 그랬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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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친구들을 만났다. 코로나 이후 처음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살아 중간지점인 강남에서 만나곤 했었다.

 

2년 만에 탄 빨간 좌석버스는 그새 요금도 올랐고 좌석 앞에 핸드폰 충전장치까지 생겼다.

편안한 자세로 등을 맞춘 후 차창으로 지나치는 가로수들을 바라보니 마음이 설렌다. 

 

친구들과의 만남도, 시야 가득 물들고 있는 가을도, 좌석버스에 기댄 나의 모습도,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음악도, 목적지가 강남인 것도 모두 나를 설레게 했다. 

 

 

 

 

남양성모성지

다음 날은 남편과 화성시 남양 성모성지를 찾았다.

불타는 듯한 단풍나무, 노란 은행나무, 갈색으로 물드는 느티나무, 미처 물들지 않은 초록잎들이 어우러져 화려하다.

 

 

 

 

어찌 이리 다른 색감으로 물드는지 사람과 같다.

다른 색, 다른 속도로 물들어 간다. 다른 모양 다른 속도로 떨어진다.

 

 

 

 

다채로운 봄꽃도 화려하고, 여름의 초록잎도 싱그럽지만, 적색, 황색, 갈색 꽃이 최고다.

나무 전체에 피는 강렬한 꽃을 당해낼 수 없다.

 

아카시아 꽃잎이 떨어지듯, 단풍이 떨어진다.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잎이 외로워 보이고, 낙엽들의 바스락 거림이 쓸쓸하다.

강렬한 꽃은 남김없이 떨어져 나무는 더 외롭다.

 

 

 

 

오랜만에 만나 소식을 들은 친구들의 안부는 예전보다 더 공감되고 마음이 쓰인다.

세월의 후반으로 함께 달려가는 동지 같은 느낌이다. 

 

성지에서 돌아오는 차창 밖으로 커다란 갈색 꽃이 나린다.

쓸쓸하고 외로워 보여 눈가가 붉어졌다. 

 

차고 쓸쓸하지만 가을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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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 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굿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란시스 잠'과 도연명과 라이널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시인.

 

오래전 어느 명절, 큰댁에 갔을 때였다.

대학 입학 후 처음 파마를 한 아들을 보고 형님께서 백석 시인 같다고 하셔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있다.

뼛속까지 문인들로 모인 이 집안에서 모두 관심 있는 시인인 듯했지만, 사실 나는 그의 시를 잘 몰랐었다.

 

얼마 전 딸이 아빠 생일 선물로 백석 시집 <사슴>을 사드렸다.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시는 '흰 바람벽이 있어'라며 책을 펼쳐 소개하자 남편은 그 시에 표시를 해두었다.

 

몇 번을 읽어 보았다.

1941년 4월 문장지에 발표된 시이다.

일제 식민지 시기 시인이 만주에 있을 당시에 발표된 작품이다.

타지에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며 시를 써 내려갔을 쓸쓸함이 내가 그 방안에 누워 있는 것처럼 전달된다.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어두컴컴한 좁은 방에 누워 흰 벽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그리운 것들.

빼앗긴 조국, 고향에 계신 늙은 어머니, 이루어지지 못했던 사랑, 평화로웠던 소소한 일상들.......

 

그러나 시인은 가난과 외로움 쓸쓸함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한다. 

슬픔 안에서 극대되는 사랑과 벅찬 그리움은 하늘이 사랑하는 이에게 내린 귀한 선물이라 여기며 말이다.

 

외롭고 여린 초생달, 바구지꽃, 짝새 그리고 당나귀를 생각하며, 

고독과 외로움을 노래했던 시인들을 벗 삼아 말이다.

 

그래서 그는 높은 사람이다. 뜨겁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사랑과 슬픔을 아는 사람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외로운 방에서 삶의 고통과 슬픔을 이겨내려 안간힘을 쓰는 시인의 모습을 생각하니 불쌍하고 가엾다.

나의 모습,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 인간의 모습이 떠올라 괴롭고 아프다.

 

더없이 슬픈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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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스무 살 생일.

 

공부가 우선이었던 중 고등학교 시절, 늘 시험기간에 생일이 있어 맘 편히 즐기지 못했던 날.

대학생이 되어도 이 좋은 계절은 여전히 시험 기간이지만, 그때와는 다른 마음으로 기대하고 즐기는 딸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스무 살 생일을 특별하게 축하해 주고 싶어 미리 레터링 케이크를 주문해 두었다.

생일 당일과 다음날 약속이 있는 딸을 위해 우리는 전날 움직였다.

 

 

 

 

 

진라이

 

 

경기 분당에 위치한 중식당을 찾았다. 

룸으로 예약을 해 거리두기를 하고, 딸과 오랜만에 코스요리를 먹었다.

 

 

 

냉채는 입맛을 돋우었고, 따뜻한 해물 누룽지 탕은 속을 달래주었다.

 

 

 

양념이 정말 맛있었던 팔보채와 소스의 부드러움과 달콤함이 마음에 들었던 크림 중새우.

 

 

 

튀김옷이 얇고 고기가 두꺼워 조금 부담스러웠던 탕수육과 간이 진했던 소고기 고추잡채와 꽃빵.

이때부터는 정말 배가 불렀다.

 

 

 

마지막으로 식사와 과일 디저트가 나왔다. 

분위기나 맛이 나무랄 데 없었고, 일하시는 분들의 친절함도 편안했다.

 

 

 

점심을 먹고 아울렛 신발매장에 들렸다. 생일 선물로 운동화 한 켤레와 한참 유행하는 뒤축 없는 뮬도 하나 사주었다.

쇼핑이라곤 거의 온라인으로 하는 딸과 함께 돌아다니니 내 생일인 듯 즐거웠다.

 

 

 

 

 

 

집으로 돌아와 케이크를 자르고 TV를 보며 웃고 떠들었다.

 

생일 0시가 되자 쏟아지는 장문의 축하 메시지들과 쌓이는 모바일로 온 선물들.

친구들에게 친절하게 배려하고 잘 챙기더니, 정말 많은 축하를 받는다.

 

홀케이크, 아이패드 파우치, 화장품, 목걸이, 레토르트 식품, 베라, 스타벅스, 치킨, 초콜릿 등등 손가락으로 죽죽 올리며 보여주는 폰 화면에 선물이 그득하다. 우리 때와는 다른 생일 축하다.

 

여기저기서 오는 문자에 고마움과 감동으로 어쩔 줄 몰라하던 딸은 지인들과 소통을 위해 방으로 들어간다.

새벽 세 네시까지 잠을 자지 못한 듯했다.

 

 

 

 

생일 아침상.

점심 약속이 있다 했지만 미역국은 먹일 요량으로 먹을 만큼만 아침을 준비했다.

맛있게 먹는 딸을 보며 행복했다.

 

전보다 편하게 말하고 농담하고 더 많이 시간을 함께 한다.

엄마 아빠랑 노는 게 제일 재미있다며 우리를 으쓱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스무 살의 시작을 본인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여러 날 즐겼다.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받은 손편지와 선물들, 취향저격인 레터링 케이크들도 선물 목록에 추가되었다.

 

 

 

부모는 역시 부모인가 보다.

기특해하며 안심하면 될 일에 걱정을 보탠다.

너무 배려하고 착하게 살면 안 되는데, 자신을 희생하며 다른 이들에게 맞출 필요는 없는데, 조금 못되게 살아야 편할 텐데.............

후배, 친구, 선배들에게 사랑받는 딸아이가 기특하기도 하지만, 착하디 착한 성품에 짠한 마음을 어쩔 수 없다.

 

기우이길.

너의 친절을 이용하지 않는 좋은 사람들이 곁에 머물길.

언제나 너를 지켜주는 가족이 있음을 기억하길.

 

 

이런저런 시끄러운 생각이 꼬리를 무는 건 부모만.

너는 스무 살의 특별했을 생일을 오롯이 즐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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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빛과 함께 카톡 알림.

 

 

부고

부친 ooo님께서 2021년 10월 8일 별세를 하셨기에 삼가 안내드립니다.

 

 

직장 동료의 아버님이 어젯밤 세상과 이별하셨다.

폐암으로 오랜 기간 투병하셨고, 얼마 전 대동맥 파열로 쓰러지신 후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들었었다.

 

육아로 오랜 기간 쉬다 다시 일하신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가벼운 인사 정도만 하고 지냈다.

활달한 성격에 키가 크고 덩치도 좋아 화통해 보이지만, 늘 인사를 건네는 건 내쪽이었고 그녀는 무언가로 바빠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가지 못했었다.

 

카톡의 프로필 사진을 열어 보았다.

500개 이상의 사진 중 1페이지는 부친의 사진이다. 활짝 웃고 계셨다.

조금 더 넘겨보니 그녀 아이들의 재미난 포즈 사진들, 남편과 함께한 가족사진, 그리고 같은 노인 사진 몇 개를 더 볼 수 있었다.

 

 

친정아버지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 더 누워있지 못하고 일어났다.

얼마 전 통화할 때 "아빠는 이제 그만 가야지." 하며 평화롭게 말씀하시던 목소리가 마음을 누른다. 늦게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셨지만 지금까지 신실한 기독교 신자이신 아빠는 늘 감사함으로 때를 기다리신다고 하신다. 그게 가능이나 할까? 두려움 없이 그날을 기다릴 수 있을까?

 

젊은 시절의 나는 왜 아빠에게 그렇게 퉁명스럽게 대했을까? 함께 더 많이 웃고, 더 상냥하게 해드리지 못했을까?

가난했어도, 우리에게 사랑의 표현이 서툴렀어도, 엄마를 고생시켰어도 나의 아빠였는데 말이다.

어떻게 그러셨는지 모르지만 없는 살림에 세 남매 대학교육, 결혼까지 다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셨으니 충분했는데 말이다.

아빠의 세월의 시간을 나는 정말 조금도 알지 못한다. 

 

 

 

장례식은 가족분들이 모여 가족장을 하려 합니다. 멀리서나마 따뜻한 마음의 위로를 부탁드리며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녀의 마음이 어떨까 헤아리다 애잔해진다.

강해 보이는 그녀가 겪어왔고, 겪어 내야 할 시간들을 생각하다 나의 감정들과 뒤섞인다.

마음이 아리고 슬픈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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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화나무 (7월, 경복궁)

 

 

나무

 

김윤성

 

 

 

한결같은 빗속에 서서

젖는 나무를 보며

황금색 햇빛과 개인 하늘을

나는 잊었다.

 

누가 나를 찾지 않는다.

또 기다리지도 않는다.

 

한결같은 망각 속에 

나는 구태여 움직이지 않아도 좋다.

나는 소리쳐 부르지 않아도 좋다.

 

시작도 끝도 없는 나의 침묵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다.

 

무서운 것이 내게는 없다.

누구에게 감사받을 생각도 없이

나는 황홀을 느낄 뿐이다.

 

나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라려고 한다.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펴려고 한다.

 

 

 


 

 

 

김광석 3집에 담긴 노래 중 하나.

나무.

 

담담하게 말하는 듯한 김광석의 목소리. 

"한결같은 빗속에 서서 젖은 나무를 보며 눈부신 햇빛과 개인 하늘을 나는 잊었소"  

요즘 무한반복 듣고 있는 이 노래의 가사는 김윤성 님의 시다.

 

엊그제는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하루 종일 쏟아졌다.

온몸으로 비를 맞고 있는 나무를 한참 올려다보았다.

끄떡없이 서서 누구의 시선에도 상관없이 묵묵히 가지를 뻗고 있는 나무.

 

어제는 바람 한점 없는 눈부신 가을날이었다.

길을 걷는데 이름 모를 나무에서 갑자기 열매가 똑 떨어진다.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는데도 어느새 열매를 품더니 인내의 끝에 성숙한 결실이 떨어진다. 

 

나무는 눈이 부시고 빛난다.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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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함께 분위기 있는 카페에 앉아 맛있는 브런치 먹는 것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군 휴가 이틀을 남기고 기회가 왔다. 남편이 평일 휴가를 내서 얻은 브런치 타임이다.

 

2주 동안 매일 친구들과의 밥약, 술약으로 여유 있는 시간이 없었던 아들.

그나마 코로나로 인한 인원제한, 시간제한 덕에 집에서 야식은 함께 먹을 수 있었다.

 

 

 

 

Brunch Cafe

37.5

 

브런치로 유명한 체인점 37.5

 

광교 호수공원을 산책할 때 보았던 파란 문의 카페. 야외 테라스 테이블에 알록달록 차려진 음식들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좋아 보였었다. 오늘은 신동 카페거리다.

 

 

 

아메리카노 두 잔과, 콜라가 먼저 나오고

 

 

 

아들의 브런치,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13.5)가 카페 문과 같은 색감의 그릇에 담겨 나왔다.

파스타면을 오무라이스 처럼 길쭉하게 모아 놓으니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따뜻한 파스타는 정말 맛있었다. 적당하게 썰린 편 마늘과 아스파라거스의 식감, 면과 어우러진 담백한 소스가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선명한 색감의 절임 야채는 식욕을 돋구어주는 새콤하고 매운맛이 있었고,

 

 

 

함께 먹으려고 주문한 푸짐한 정통 미국식 브런치(15.5)는 딱 예상되는 그 맛이었다.

오랜만에 먹은 소시지와 해시드 포테이토가 내겐 특별히 맛있었다.

 

 

 

아들이 떠났다.

군복을 갖춰입은 아들에게 폰 카메라를 들이대니 거수경례를 하며 응답한다. 

경례를 하는 표정에 군기가 잔뜩 들어 긴장이 묻어난다. 카메라가 자신의 상관이나 되는 듯이.........

보내는 마음이 좋지 않다. 훈련소로 갈 때와는 다르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 울컥하는 감정이 있다.

휴가를 자주 나올 수도 없겠지만, 또다시 보내야 하는 마음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모든 게 생각 같지 않다. 아들이 부대로 떠나고 나니 해주지 못한 일들이 생각난다. 챙겨주지 못한 것들도 아쉬움을 남긴다. 이러이러한 일을 계획하고, 저러저러한 마음을 먹지만, 서로 다른 상황과 생각, 감정들의 차이는 원래의 기대나 계획에 부응하지 않는다. 실수나 예상치 못한 일들도 도처에 깔려있다. 우리네 삶은 잘 짜인 대본, 극에 맞게 준비된 배경, 한치의 실수도 없이 연기하는 배우들의 연극 무대와는 다르게 흘러간다.

 

 

올 11월 상병이 되는 아들.

늘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낸다고, 정말 할 만하다고 얘기하는 아들. 그럼에도 나는 상상 속의 온갖 것들을 끄집어내 걱정을 하며 마음을 졸인다. 6개월 동안 그러했듯이, 남은 1년도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잘 지내리라 믿는다. 최근 소초 환경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잘 적응하며 살아내리라 생각한다. 상처 받지도 주지도 말고 묵묵히 자신의 책임을 하다 보면 시간은 가겠지.

 

걱정은 접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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