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생일이 또 한 번 지나간다.

 

이번 생일에는 남편 덕에 좋아하는 갈치조림을 배불리 먹었고, 오래전부터 하나 있었으면 했던 14K 링 귀걸이도 생겼다.

딸은 좋아하는 드라이플라워 목화 꽃다발을 들고 들어왔다. 꽃말이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했더니 그건 몰랐다고 했다. 케이크로 유명한 카페에서 싱싱한 딸기가 잔뜩 올려진 쵸코 케이크를 구입해 나이만큼 초를 꽃아 주었다. 미역국은 먹어야 한다며 미역을 참기름으로 달달 볶아 푹 끓여 한 그릇 떠다 주었다. 아들은 근무 전, 생일 축하한다는 밝은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정말 모두 감동이었다. 

 

 

 

 

 

이제는 나이에 더하기를 하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세월을 무사히 살아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 모든 일들을 기억할 순 없지만, 경험으로 얻고 깨달은 것들, 쌓여가는 가슴 찡한 추억,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들이 나를 더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드디어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감상했다.

주인공(윤정희)의 뛰어난 연기에 심하게 감정이입이 되었다. 

 

주인공은 요양보호사 일을 하며, 이혼 후 멀리서 일하는 딸을 대신해 손자와 둘이 어렵게 살아가는 66세 노인이다. 기억과 인지기능에 문제가 있는 알츠하이머 병을 앓고 있지만, 멋을 부릴 줄 알고 꽃도 좋아하는 소녀 같은 감성을 가졌다. 간절히 시를 쓰고 싶어 문화원에서 시 창작 수업을 들으며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유심히 보고 관찰하지만 시상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던 중, 요양 보호사로 일하다 당한 수모, 여고생 희진이의 자살, 그 사건에 연루된 자신의 손자, 죄를 묻으려 했던 부모들의 뻔뻔함 등을 겪으며 그녀를 둘러싼 현실의 고통과 아픔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살구는 스스로 땅에 몸을 던진다 깨여지고 밟힌다 다음 생을 위해

 

그녀의 노트에 적힌 메모처럼, 고통 속에서 진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그녀는 희진이를 추모하며 아름답고 긴 시를 쓸 수 있게 된다. 괴로움 가운데 그녀는 비로소 시인이 된다.

 

 

문화원 수강생들이 '내 인생에 아름다웠던 순간'에 대한 기억을 발표하는 시간.

그 순간들을 이야기하며 모두 눈가에 눈시울이 맺힌다. 나의 일들을 잠시 생각해 보니 어김없이 가슴이 옥죄어 오고 목이 멘다. 고통 끝에 온 행복이어서인지, 찰나의 행복 뒤에 괴로움이 생각나서인지, 아름다운 순간은 그냥 슬픔인 건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밝고 화려해 보이는 아름다움보다 슬픔을 간직한 것들은 더 아름답다.

슬프게 아름답다는 말이 주는 의미가 또렷해진다.

 

그러니 인생은 괴롭고 슬프지만 아름다운 것이고, 아름답지만 고통스럽기도 아프기도 한 것이다. 

최은영 작가의 소설 <내게 무해한 사람>에 나오는 표현 '따뜻한 온도에서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

그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번의 생일이 그렇게 지나간다. 아름답지만 슬프게.

 

 

 

 

 

'♭일상·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채꽃, 그리고 바람  (0) 2022.05.03
다시, 산수유  (0) 2022.03.21
군에 있는 아들의 생일  (0) 2022.01.03
Adieu 2021  (0) 2021.12.31
가을에 핀 꽃  (0) 2021.11.0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