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11일 밀란 쿤데라가 세상을 떠났다.

 

괴테나 베토벤, 헤밍웨이, 셰익스피어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책이나 예술 작품에서 만났을 때 묘한 동경심 같은 것이 있었다.  '내'가 '밀란 쿤데라'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것이 이상하리만큼 비현실적이다.

 

1929년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난 그는, 1948년 체코 공산당에 입당했으나 1950년 당에 반하는 활동으로 추방당하고, 1956년 다시 입당 승인되었으나 1970년 다시 추방당한다. 스탈린의 정치에 회의를 느낀 그는 반 공산주의자로 활동을 하게 되며 1968년 프라하의 봄에 참여한다. 이후, 저서가 압수되고 탄압을 받으며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한다.

그의 작품들에는 시대와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우스꽝스럽게 혹은 진지하게 그려진다.

 

<우스운 사랑>은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투영하기에 어느 것보다 애착이 가는 작품"이라고 애정을 보인 초기 연작집이다.

 

 

 

 

사랑 하나.아무도 웃지 않으리

 

가벼운 농담으로 시작된 한 개인의 파멸이 전체주의의 무거움 속에서 약간은 우스꽝스럽게 그려지고 있다.

나의 거짓말은- 당신이 그렇게 부르고 싶다면 - 바로 내 본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야. 그러한 거짓말을 내가 하는 척하는 게 아냐. 그러한 거짓말 속에서 나는 실제로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거지. 그렇지만 이 세상에는 내가 통찰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일들이 있지. 내가 사랑하고 진지하게 여기는 일들이 있단 말이야.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나는 농담으로 대하지 않아. 그런 것들을 두고 내가 거짓말을 하면, 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거든.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건 당신도 내게 요구할 수 없어. 그런 일은 절대 하지 않을 테니까.

 

 

 

사랑 둘. 영원한 그리움의 황금 사과

 

글자 그대로 우리가 무언가를 믿게 되면, 우리는 그 믿음 때문에 끝내는 불합리성에 도달하게 되지. 어떤 특정한 정책의 진정한 신봉자라면 그 정책의 궤변이 아니라, 그 궤변 뒤에 숨어 있는 실제적인 목표에 주목하지. 정치적인 구호와 궤변은 결국은 우리더러 믿으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야. 오히려 그것들은 공동의 협의된 구실로 이용되는 거야. 그것들을 말 그대로 믿는 바보들은 조만간 그것들의 모순을 발견하고, 봉기를 꾀하기 시작하다가 마침내는 굴욕적으로 이단자나 배신자로 종말을 고하게 되는 거야. 아니, 지나친 믿음은 결코 좋은 결실을 가져다주지 않아. 이것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체제에 해당하는 말일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가씨를 정복하려고 할 때의 예의 그 체제에서도 해당되는 내용이야.

 

결코 손에 잡히지 않는 그린 라이트,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동경, 영원한 그리움의 황금사과!

 

 

 

사랑 셋. 히치하이킹 놀이

 

육체와 영혼을 결코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는 그녀, 사랑하는 사람과 거짓하나 없기를 바라는 진지한 그녀.

그녀는 우울한 질투심으로 히치하이킹 놀이를 시작한다. 

무책임한 놀이 속에서 뻔뻔하고, 자유분방하며 가벼워질 수 있었다. 놀이가 극단적이 될수록 그들은 서로의 경계를 넘게 된다. 장난으로 시작한 놀이가 원래의 삶을 공격한다.

 

그는 그녀의 개성을 특징 지워 주었던 윤곽은 단지 허상에 불과하며, 그러한 허상을 바라보다 희생된 상대가 바로 그 자신임을 깨달았다. 실제로 그가 사랑했던 그 아가씨는 그의 동경과 유추와, 신뢰의 산물에 불과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서야 비로소 그의 여자친구의 진정한 모습이 그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 절망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절망적으로 낯설게, 절망적으로 모호한 모습으로. 그는 그녀를 증오했다.

 

모든 놀이가 끝난 후 "나는 나야, 나는 나야.............. " 하고 흐느끼는 그녀를 향해 청년은 생각한다.

다만 미지의 크기가 또 함께 들어 있을 그녀의 맹세의 슬픈 무의미만을_____________.

 

마약에 취하듯 놀이에 취해 정 반대의 모습을 연기했던 그녀를 오해하며 그들은 멀어진다.

오해일까? 진실일까? 우리의 내면에는 수많은 다른 '나'가 존재한다. 

카멜레온 같은 나, 감정을 내면에 묻은 채 표현하지 않는 나,  모든 다른 나임에도 '나는 나'라고 흐느끼는 우리는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이다.

 

 

 

사랑 넷. 사랑의 심포지엄

 

블투명하고, 우스꽝스럽고, 즉흥적이고 무심한 사람들, 사랑들.......

 

 

 

사랑 다섯. 늙은 주검은 젊은 주검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남자의 가슴속 기념비와 여자의 외부에 서 있는 기념비.

영원하지 못할 그 순간. 그때는 그때일 뿐.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 

늙은 주검은 젊은 주검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사랑 여섯. 20년 후의 하벨 박사

 

그토록 에로틱한 명성을 얻었던 하벨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더 이상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순종적이 되었고 외롭고 서글픈 감정을 느낀다.

그의 아내인 유명한 여배우는 하벨이 그녀를 버리고 떠날까 봐 시기심에 늘 불안하다.

반면 하벨은 그녀의 유명세 덕에 매력 없어진 자신의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었다.

 

파트너의 외모, 지위, 인격 등에 영향을 받는 나. 

사랑의 현재성

사랑이라는 착각

육체적인 쾌락

말의 수집

우스운 사랑

 

 

 

사랑 일곱. 에두아르트와 신


신을 믿지 않는 에두아르트가 신을 믿는 알리스를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한 후 겪는 곤란함과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

형이 그 미친 사람한테 순수한 진실만을, 형이 그 사람을 보고 느낀 것만을 이야기한다면, 형은 결국 미친 사람과 진지한 대화를 하는 꼴이 되고 말고, 결국에는 형도 미칠 거예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도 다 마찬가지예요. 내가 그녀의 면전에 대고 옹고집쟁이처럼 진실을 말했다면, 그건 내가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꼴이 되고 마는 거예요. 그러나 그처럼 진지하지 않은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스스로 진지하지 않게 되는 걸 뜻하지요. 형, 나는 이 모든 미치광이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또 그들 중의 하나가 되지 않으려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어요.

 

알리스와 나눈 사랑의 이야기는 어떤 진지함이나 의미도 없이 우연과 착각으로 짜여진 무가치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그에게 분명해졌다.

 

이 세상의 누구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의 인생은 슬플 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에두아르트는 신을 동경한다. 왜냐하면 신만이 모든 정신분산적인 의무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은 단순하게 존재할 수 있고, 그리고 신만이 (단독자, 유일자, 비존재자로서) 이 비본질적인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존재적인) 세계에 대응할 본질적인 반대세력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사진 속 책은 절판되고, 지금은 <우스운 사랑들>이란 제목으로 바뀌었다.

 

밀란 쿤데라의 입문서라 할 정도로 다른 작품들의 모티브가 되어 보이는 내용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영혼과 육체, 가벼움과 무거움, 농담과 진지함, 인간의 실존에 대한 고뇌의 일관성을 우스꽝스러운 사랑의 에피소드 안에서 우습지만 또 마냥 가볍지 않은 톤으로 그리고 있다.

 

농담(1967)

사랑(1968)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

불멸 (1990)

정체성(1998) 

무의미의 축제(2014)

 

내가 접한 밀란 쿤데라의 책들이다. 

출판된 시기 순으로 다시 읽어보려 한다. 그의 다른 책들도 사이사이에 넣어 볼 생각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정체성>, <불멸> 이후 이 책을 보았다. 어쩌면 밀란 쿤데라의 유작이 될지 모를 소설, <무의미의 축제>는 그의 생각을 정리한 책이 아닐까? 라는 마음으로 읽었다.

주인공들에게 진한 우정을 느끼는 작가의 시선은 여전히 따뜻했고, 책에 스며있는 그의 사상과 문체, 세련되고 독특한 전개 방식 등 낯설지 않은 느낌이 좋았다. 

 

 

 

 

많은 사람들은 의미 있는 순간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의 선택에 의미를 부여하고 뿌듯해하며, 우연히 생긴 일에도 의미를 선사한다. 

그럼으로써 생기있는 행복감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매사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다 보면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칠 수 있고, 삶이 곤하고 불행할 수도 있다.

하나의 농담에 진지한 의미를 두면 관계나 상황을 무겁게 만들 수 있다.

무엇보다, 의미있는 일과 무의미한 일에 대한 미묘한 경계의 판단은 개인적이기에 타인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다.

 

 

 

 

의미 있는 일에 집중하고 살았다면, 무의미한 일들에 대한 작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외모나 몸매 성격 등의 개별성보다는, 비슷하고 무의미한 배꼽에 매력을 느끼는 획일성을 가진 시대.

알랭이 뤽상부르 공원을 거닐다 느낀 무심하게 고요하고 평온한 행복감.

다르델로의 세련되고 기교 섞인 말보다, 카클리크의 주의를 끌지 않는 보잘것없는 태도에 반하는 여성들.

파티 장소 위를 떠다니는 의미 없는 깃털 하나에 쏠린 사람들의 시선.

 

전립샘 비대증을 가진 칼리닌은 스탈린 앞에서 소변을 참지 못하고 실수했던 보잘것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기의 악마 스탈린은 그에게 특별한 정을 느끼고 칸트가 살던 도시에 유명인사가 아닌 칼리닌의 이름을 붙였다.

 

팬티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괴로움을 견딘다는 것...... 청결의 순교자가 된다는 것...... 생기고, 늘어나고, 밀고 나아가고, 위협하고, 공격하고, 죽이는 소변과 맞서 투쟁 하나는 것...... 이보다 더 비속하고 더 인간적인 영웅적 행위가 존재하겠냐? 나는 우리 거리들에 이름을 장식한 이른바 그 위인이라는 자들은 관심 없어. 그 사람들은 야망, 허영, 거짓말, 잔혹성 덕분에 유명해진 거야. 칼리닌은 모든 인간이 경험한 고통을 기념하여, 자기 자신 외에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은 필사적인 투쟁을 기념하여 오래 기억될 유일한 이름이지.

 

 

 

 

 

시대의 작가는 그의 말, 글 그리고 행동으로 세상이 달라지기를 얼마나 고대하며 살아왔을까?

만고의 노력 끝에도 한심한 세상을 바로잡을 도리가 없다는 것을 작가도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이런 희망 없는 세상을 어떻게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까?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네 성도 마찬가지로 네가 선택한 게 아니야.  네 눈 색깔도, 네가 태어난 시대도, 네 나라도, 네 어머니도. 중요한 건 모든 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권리들이란 그저 아무 쓸데없는 것들에만 관련되어 있어. 그걸 얻겠다고 발버둥 치거나 거창한 인권선언문 같은 걸 쓸 이유가 전혀 없는 것들!"

 

모든 것이 진지하고,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세상, 농담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심지어 역겨운 거짓말로 여겨지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는 삶이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고통받으며 살기보다는, 소소하고 일상적이지만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들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다. 

 

 

 

 

"나는 원체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그런 것들,............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 멎는 곳에서 죽는 것이 나의 꿈이라면 꿈이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김희성의 대사다.

그는 무의미한 것들을 사랑하며 인생을 가볍게 살려고 했지만, 결국 시대적 상황과 무거운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이제 나한테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더 강력하고 더 의미심장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로맹 가리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의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무의미의 축제>의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이 문장들이 계속 동일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민음사]

 

 

 

정체성. identity.

나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까?

 

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를 저장한 후, 자신을 어필하는 한 줄 문구를 고민해 본 경험은 대부분 있을 것이다.

성실하고 꼼꼼함, 밝고 친절함, 친화적인 사람, 믿음직하고 끈기 있음, 센스 있고 적응력 최고 등등 업무 직종에 적합할 듯한 자신에 대한 광고를 걸어놓는다.

 

에릭슨의 발달 이론에 따르면 청소년기(12-18세)에 정체감과 역할 혼미의 과정을 겪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는데, 타고난 성정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환경, 현실과의 상호 작용, 성공과 실패 등의 경험을 겪으며 한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이 확립된다.

 

개인이 청소년기에 확립한 정체성은 하나의 브랜드 광고 문구처럼 나를 잘 드러내 줄 수 있을까? 

사람 잘 안 변한다는 말처럼 한 번 확립된 정체성은 바뀌지 않는 단단한 그 무엇일까?

 

나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준 책이다.

 

 

 


 

 

 

밀란 쿤데라의 책은 표지 그림이 말해주듯,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두 주인공 샹탈장 마르크의 이야기이다.

 

성년기의 문턱을 넘어설 무렵 샹탈은 '장미 향, 팽창하고 정복하는 향기'가 되어 남자들의 인기를 차지하고 싶다는 막연하고 서정적인 꿈이 있었다. 그러나 결혼 후 아이의 죽음과 이혼의 과정을 거치고 연하인 장 마르크와 동거를 하면서 꿈은 잠들어 버렸다.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 어느 날 느낀 샹탈의 좌절감.

 

연인인 장 마르크는 그녀의 우울과 열패감을 안타까워하며 의기소침해진 그녀를 회복시켜 줄 의도로 익명의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나는 당신을 스파이처럼 따라다닙니다. 당신은 너무, 너무 아름답습니다."

 

샹탈은 처음에는 불쾌한 감정이 들었지만, 정중함과 진실함이 느껴지는 지속적인 편지로 삶에 생기마저 돌게 된다.

반대로 장 마르크는 자신임을 속이고 보낸 편지가 연인을 흥분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질투심을 느끼면서도 이 일을 당분간 지속하게 된다.

 

결혼 생활 동안 맘에 들지 않았던 시댁살이에도 착하고 고분고분했던 샹탈, 아이의 죽음 후 자유의 몸이 되어 시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쏟아부었던 그녀, 직장에서의 차갑고 사무적인 그녀, 장 마르크와 있을 때의 그녀, 익명의 편지에 반응하며 달라진 그녀는 모두 달랐다. 순종? 위선? 무관심? 절도? 그 무엇이건 말이다.

 

당신이 내가 상상하는 사람이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내가 착각을 했다는 생각. (장 마르크)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의 모습은 조금씩 달라진다. 우리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그에 맞는 가면을 갈아 쓰며 살아가고 있다.

어떤 얼굴, 어떤 마음, 어떤 상황의 모습이 진짜 나인지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면서 말이다.

 

내겐 두 얼굴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두 얼굴을 갖는 것에서 어떤 재미를 찾는 법을 터득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두 얼굴을 갖는 것은 쉽지 않아. 노력을 요하고 규율을 요구하는 거야!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싫건 좋건 간에 내겐 잘하고 싶은 야심이 있다는 것을 알아줘. 직장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기도 하지만, 완벽하게 일을 하면서 동시에 그 일을 경멸하는 게 아주 어렵지. (샹탈)

 

 

요즘처럼 SNS가 관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시대에서 정체성의 혼란은 더 심해 보인다.

우리는 저마다 ID라는 가면을 한 개씩 혹은 더 많이 가지고 있다.

면전에서 하지 못할 욕설이나 비방글, 쉽게 드러내기 어려운 정치적인 성향, 심지어 누군가에게 따뜻한 칭찬글을 쓸 용기도 생기게 된다.

대면에서의 가면은 나를 감추는 가면, 비대면에서 익명의 가면은 나를 드러내는 가면 같아 보인다.

 

 

 

 


 

 

 

결국 샹탈은 편지를 보낸 주인이 장마르크임을 알게 되고 그가 자신을 염탐해 떠날 구실을 찾고 있었다고 오해하게 된다. 연상인 샹탈은 연애의 약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을 빼고 난다면 경제력과 능력을 쥐고 있는 샹탈이 우세했다. 그녀는 그를 떠날 결심을 하고 무작정 런던행 기차를 탄다.

샹탈은 기차역에서 우연히 직장 동료들을 만나 합류하게 되고, 장 마르크는 그녀를 찾기 위해 헤매다 같은 열차를 타게 된다. 

 

(기차 안에서) 그녀는 명랑했고 그것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그녀에게서 본 적 없는 생동감에 가득 찬 그녀의 몸짓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하는 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위아래로 정열적으로 움직이는 그녀 손이 보였다. 이 손이 그녀 손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손이었다. 샹탈이 그를 배신했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그건 별개다. 그녀는 더 이상 그를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곳으로, 다시 만난다 해도 그녀를 바라볼 수 없는 다른 생으로 가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을 떠난 그녀의 모습이 명랑한 것에 대한 질투와 속상함 등으로 엉망이 된 장 마르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인생의 전부와도 같았다.

 

당신을 알고부터 모든 게 달라졌어. 내 하찮은 일이 예전보다 흥미로워진 것은 아니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우리 대화 소재로 삼았기 때문이지.
샹탈은 자신의 희극적 상상에 몰입했고, 반면 장 마르크는 자기와 세계가 맺고 있는 유일한 감정적 관계가 그녀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한 후부터 상탈의 죽음은 항상 그의 곁에 있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어디서부터가 꿈인지, 누구의 꿈인지 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결국 그 소란스러운 소용돌이 끝에서 그들은 서로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 거야. 쉴 새 없이 당신을 바라보겠어. 
내 눈이 깜박거리면 두려워. 내 시선이 꺼진 그 순간 당신 대신 뱀, 쥐, 다른 어떤 남자가 끼어들까 하는 두려움. 
그냥 당신을 보기만 할 거야.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 놓을 거야. 매일 밤마다. 

 

 

 


 

 

 

이춘수의 시 <꽃>이 생각났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로 너는 나에게로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남편에게 장난처럼 "당신의 정체성이 뭐야?"라고 물으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하고 장난으로 받아친다.

정체성은 어쩌면 타인이 정의해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는 그 사람에게 어떠어떠한 이미지로 다르게 기억되기 때문이다.

 

 

오래전 아이들에게 읽어 주었던 영어동화책 A Color of His Own(By Leo Lionni)의 내용은 정체성에 대한 해답을 쥐고 있는 듯하다.

 

모든 동물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색이 있다. 

그러나 카멜레온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색이 변한다. 노랑, 보라, 줄무늬로.......

자신의 고유한 색을 갖고 싶어 했던 카멜레온은 초록 나뭇잎 위에 계속 머물렀다.

가을이 오자 나뭇잎은 노랑으로 바뀌었고 카멜레온도 변했다. 다시 그 잎은 빨강으로 변하고 카멜레온도 그랬다. 

겨울이 되자 떨어지는 잎과 함께 카멜레온도 떨어졌다.

 

우울한 겨울을 보내고 봄이 되자 그는 다른 카멜레온을 만나게 되었다.

"Won't we ever have a color of our own?" (우리 자신의 색을 가질 순 없을까?}

"I'm afraid not" (유감이지만 가질 순 없을 거야) 

"But, why don't we stay together?" (그렇지만 우리 함께 지내면 어떨까?)

 

지혜로운 카멜레온의 제안으로 둘은 함께 머물며 어디를 가든 언제나 같은 색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의 고유한 색이 생긴 것이다. 

 

And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행복했다.)

 

 

 


 

 

 

광고란 삶의 단순한 물건을 시로 변형한다는 거야. 그 덕분에 일상성이 노래하기 시작했다나. 

 

샹탈의 상사가 했다는 이 말은, "단순했던 존재의 이름을 불러주고 사랑을 주면, 생기 있고 명랑한 사람이 되어 현재를 즐기는 행복감을 맛볼 수 있을 거야"라고 들렸다.

 

 

우리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함께 할 누군가가 있을 때 나는 소중한 사람이 되며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현재 나의 곁에 누가 있는지 돌아보자.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 고유한 색을 지닌 나 자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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