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일곱 편의 단편들 중  표제 소설인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나와 대학 강사, <몫>은 한 대학의 교지 편집부에서 만난 인연들, <일 년>은 정규직인 나와 인턴사원, <이모에게>에서는 이모와 조카, <답신>은 나와 언니 그리고 조카, <파종>은 나와 오빠 그리고 그녀의 딸,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은 나와 두 딸과 손자 등, 소설 하나하나 모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최은영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 사람 사이의 관계가 정말 많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수많은 인연과 관계 맺음이 사랑과 우정, 행복감을 주지만, 서운함과 외로움,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녀의 소설들을 읽으며 나의 감정을 확인하기도,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기도 한다. 
 
2009년 용산 참사, 1996년 고대생 집단 폭력, 대학원 교수의 성희롱 사건, 맞아 죽은 여자들의 역사, 살기 위해 남편을 죽여야 했던 여자들,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 등 사회문제들이 드러난 이 책은, 국가, 사회, 제도가 한 인간과 그 관계에 무한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조용히 말하고 있다.
 
경쟁과 차별, 부조리가 가득하고, 생각과 가치관이 다른 세상에 서 있는 자체로 인생은 고달프다. 포기하고 싶도록 말이다. 그럼에도 순간순간 날아오는 돌멩이들을 맞으며 버틸 수 있는 것은, 아주 희미한 빛, 한줄기 따스한 햇볕이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 그런 을 좇고 싶었는지 모른다.  _<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다희와 주고받던 이야기들 속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내던 마음이 있었으니까, 아무리 누추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서로를 마주 볼 때면 더는 누추한 채로만 남지 않았으니까, 그때, 둘의 이야기들은 서로를 비췄다. 다희에게도 그 시간이 조금이나마 이 되어주었기를 그녀는 잠잠히 바랐다._<일 년>

없어지지 않으면 좋겠어...... 바라지 않아도 그 흔적은 사라지지 않을 거야. 그녀는 속으로 말했다. 푸른 무청이 가득한 텃밭을 그리면서. 그곳으로 찾아올 햇볕과 비와 바람과 작은 벌레들을 기다리면서._<파종>

그들에게 별빛은 신의 눈빛이거나 더는 만날 수 없는 사랑하는 존재들의 시선이었다. 밤 비행을 할 때면, 검은 하늘을 날아가고 있을 때면 나는 종종 멀리서 나를 바라보는 이모를 느낀다._<이모에게>

 
 
영화 <밀양, Secret Sunshine>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물 고인 작은 웅덩이, 아무렇게나 내팽겨진 물건들, 머리카락이 뒤엉키는 땅 위로 따스한 햇볕이 비친다. 불행과 상처로 가득한 신애(전도연)는 그 비밀스러운 빛, 희미한 빛 때문에 또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지나가고, 무엇이 그대로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녀가 당신의 에 기댈 수 있도록, 당신은 정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_<몫>

니는 영원히 널 사랑할 거야.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결국 찢어버릴 편지를 쓰는 마음이라는 것도 세상에는 존재하는구나.(....) 나는 너와 함께했던 시간을, 그리고 함께 할 수 없었던 시간조차도 마음 아프지만 고마워할 수 있었어._<답신>

작고 연약한 순간이 아직은 자신을 떠나지 않았음을 바라보면서._<사라지지 않는>

 
 
친정 식구들과 이번 명절 식사 후, 서점에서 책 하나씩 고르라는 언니의 말에 최은영 작가의 책을 집어 들었다.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나와는 성격이 많이 다른 언니와 어린 시절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속 깊은 이야기를 하고 지내는 다정한 사이가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던 우리 집에서 맏이로 살아온 그녀에 대해 난 잘 알지 못한다. 
출가 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가족행사가 있을 때마다 만나 좋은 시간을 보내지만 그것도 잠깐 뿐이다.
 

내 마음 안에서 나는 판관이었으니까, 그게 내 직업이었으니까. 나는 언니를 내 마음의 피고인석에 자주 앉혔어. 언니를 내려다보며 언니의 죄를 묻고 언니를 내 마음에서 버리고자 했지. 그게 내가 나를 버리는 일이라는 걸 모르는 채로. 그때 내 마음에서 나는 옳고 언니는 그르고, 나는 맞고 언니는 틀리고, 나는 알고 언니는 모르고, 나는 할 수 있고 언니는 할 수 없고, 나는 용감하고 언니는 비겁하고, 나는 독립적이고 언니는 의존적이고, 나는 떳떳하고 언니는 비굴하고, 나는 배려하고 언니는 이기적이고, 나는 언니를 지켰고 언니는 나를 버렸지. 모든 것이 분명해서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믿었어. 하지만 긴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그중 어느 하나도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아. _<답신>

 
우리는 타인을 알 수 없다. 내가 판관이 되어 생각하는 상대방은 진실일 수 없다. 진심을 알지 못하는 채, 나는 언니를, 언니는 나를 얼마나 오해하고 있을까? 
 
이 책은 나의 언니가 사준 책이라 더 소중하다.
내년 설 연휴, 엄마와 언니 나 그리고 나의 예쁜 딸, 네 여자들의 일본 여행을 위해 통장을 개설했다.
 
 
 
 
 
 
 
 

<문학동네>

 

 

 

 

사랑하는 책, <쇼코의 미소>의 저자. 그녀의 소설이다.

장편인 줄 알았는데 중단편 소설 모음집이었다.

 

 

그 여름

601, 602

지나가는 밤

모래로 지은 집

고백

손길

아치다에서

 

 

총 일곱 편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어리고 젊다. 

찬란함과 미숙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십 대와 이십 대. 민감하고 순수한 그들은 관계를 맺기도 상처 받기도 쉬워 보인다.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에는 내가 지나온 미성년의 시간이 스며있다. 쉽게 다루어지고, 함부로 이용될 수 있는 어린 몸과 마음에 대해 나는 이 글들을 쓰며 오래 생각했다. _<작가의 말> 중

 

 

 

 

 

표지 제목 <무해한 사람>이라는 제목의 소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다섯 번째 이야기「고백」에서 미주가 생각했던 진희의 정의였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그러나 표제는 책을 읽는 내내 나의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던 말이었다.

 

진희가 엎드려 자고 있을 때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볼펜을 이리저리 돌릴 때 미주는 자신이 진희를 안다고 생각했다.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그때가 미주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미주의 행복은 진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_ <고백>

 

 

 

 

 

나는 무해한 사람인가?

나에겐 누가 무해한 사람인가?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노력한다. 누군가에게 무해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나 자신을 장렬히 희생하기도 한다. 그러한 노력 없이 원만한 관계가 유지되기란 어렵다.

 

그러나, 나에게 무해한 그 누군가의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기란 쉽지 않다.

상대의 고민과 인내의 시간들, 공허함과 가슴 아린 아픔을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만약, 적나라하게 알게 된다면 그 희생을 밟고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수이는 단 한 번도 자기 상처를 과시한 적이 없었다. 자기 상처로 누군가를 조종하는 일이 가장 역겹다고 믿는 사람처럼 그런 가능성 자체를 차단했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려 했고, 그게 무엇이든 모든 것을 삼켜내려 했다. 그런 수이가 소리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울고 있었다. _ <그 여름>

 

어쩌면 여자도 울고 싶었는지 모른다. 혜인에게 기대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행동들이 혜인과 자신 사이를 망쳐버릴까 봐, 혜인을 떠나게 할까 봐 자제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명랑한 사람이고, 나는 심각하지 않은 사람이고, 나는 가벼운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어야지 버림받지 않고 관계를 맺어갈 수 있다고 배우며 자라왔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웃음으로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순간이 되었을 때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_ <손길>

 

 

 

 

 

사소한 하나의 눈빛, 표정, 말, 행동으로도 관계는 뒤틀려버릴 수 있다.

크게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어쩌다 한 그 사소함이 상대에게 큰 상처를 줄 수가 있다.

단 한번 긴장의 끈을 놓았을 때, 관계의 절단을 초래한다면 그건 가혹하다. 가슴 아프다.

 

나는 언제나 사람들이 내게 실망을 줬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망을 준 나 자신이었다. 나를 사랑할 준비가 된 사람조차 등을 돌리게 한 나의 메마름이었다. _ <모래로 지은 집>

 

 

 

 

 

그녀의 소설은 마음을 울린다. 아주 미세하고 예민한 관계의 감정들을 건드린다.

그녀의 첫 소설집, <쇼코의 미소>를 읽고 관계의 외로움과 슬픔에 대해 공감하고 눈시울이 붉어졌었다.

십 대 이십 대는 아니지만 이 책도 다르지 않았다. 

 

지금도 주희는 예전처럼 이 관계를 돌보려 하고 있었다. 하기 힘든 말을 애써서 겨우겨우 이어나가면서. 그런데도 윤희는 그 마음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_ <지나가는 밤>

 

 

 

 

 

나에게 무해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중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희생을 인지하는 것이 나의 달콤한 행복을 앗아가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소설들의 결말은 결코 해피 엔딩이 아니다. <쇼코의 미소>의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헤어짐으로 끝난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아마 인간에 대한 연민일 것이다.

참아내는 것이 사람들의 윤리라면 인생은 참 쓰디쓴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언제나 알아서 잘하고 동생 잘 챙긴다고 칭찬을 받았던 누나도 하민처럼 외로웠을까. 누구에게도 걱정을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그녀도 애를 썼을까. 그렇게 태어난 사람은 없는 거잖아._ <아치다에서>

 

 

 

 

 

나에게 전혀 무해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내가 전혀 무해한 사람이 되어 줄 수 있을까?

나의 희생과 다른 이의 희생이 얼마나 넘쳐야 그게 가능할까?

 

다른 이의 희생을 담보로 행복해지고 싶지도, 나의 희생을 감수한 채 다른 이의 행복을 마냥 지지해 주고 싶지도 않은 미묘한 감정들.........  우리는 어쩌면 그 경계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노란 표지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들 모두 슬프고 애련하다.

"따뜻한 온도에서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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