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이 깨어나는 성실한 계절,
하늘과 닿아있는 키 큰 벚나무의 잔 가지들이 붉은빛을 띠며 개화 준비를 하고 있다.
한쪽에선 이미 색을 드러 낸 하얗고 노란 그리고 분홍빛의 꽃들 사이로 연초록의 잎이 더해져 여리디 여린 초봄의 기운이 온 세상을 물들인다.
봄다운 따스함을 느낀 오늘, 왕과 왕비들의 신주를 모셔 둔 종묘를 찾았다.
모두를 말에서 내리게 했던 하마비는 예를 갖추어야 할 장소임을 일깨워 주었고, 화려하지 않은 종묘의 정문은 경건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종묘와 더불어, 2001년에는 제례와 종묘제례악 역시 인류 무형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하니 그 옛날 선조들의 지혜와 업적이 놀라울 뿐이다.
봄의 시작은 여리고 은은하다. 만개한 꽃, 푸르른 나무의 향연에 앞선, 소중하고 아름다운 순간이다.
잎 보다 먼저 꽃을 피우는 진달래의 연분홍 빛을 군데군데서 만날 수 있었다.
신로를 중심으로, 왼편 세자의 길과 오른쪽 왕의 길이 신비롭게 이어져 있었다.
먼저 정전 쪽으로 향했다.
정전은 태조의 신주를 비롯해 공덕이 있는 역대 왕과 왕비 49분의 신주를 모셔 둔 장소이다.
올 하반기까지 공사 예정이라 일부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다.
다행히도 남신문을 통과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박석이 촘촘하게 깔린 장대한 월대, 가로로 끝없이 이어진 듯한 지붕, 그 아래 소박하게 단청을 입힌 이어진 기둥들. 정전의 모습에 압도당하는 순간이었다.
월대 아래쪽 마당에 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배향 공신당과, 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칠사당 건물이 동서로 자리한다.
배향공신 신주 봉안도를 들여다보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학자 이황, 이이 등의 이름도 쓰여 있었다.
영녕전으로 가는 길에 기다란 정자처럼 보이는 곳이 있어 발걸음을 멈춰 보니, 종묘제례시 음악을 담당하는 악공과 무원들의 대기실 같은 곳이었다.
길을 돌아 마주한 영녕전은 태조의 4대조와, 왕과 왕비의 신주 총 34위가 모셔져 있는 별묘이다.
산수유와 닮아있지만 더 풍성해 보이는 꽃 뭉치의 생강나무가 아름다운 영녕전 앞으로 자라 있었다.
파란 하늘, 따뜻한 기운이 도는 온도, 은은한 봄의 빛깔, 새소리가 크게 느껴질 정도로 고요한 사위는 왕과 왕비들이 편히 쉬기에 좋은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스한 햇살을 등으로 받으며 건물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고요한 분위기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곳, 거칠고 단단한 박석 사이로 끈질긴 초록의 생명들이 자라고 있었다.
영녕전 건물 옆, 악공청을 지나가던 중, 무리를 지어 자라는 노란 개나리가 눈길을 끌었다. 작은 잎이 네 개 달린 꽃은 스케치북에 그리기에도 색을 입히기에도 무척 쉬워 보였다.
정전과 맞닿아 있는 전사청 일원은 제례에 필요한 음식을 마련했던 곳이다.
동문 옆 수복방은 종묘를 지키는 관원들이 사용했던 공간이고, 그 앞에 너른 찬막단은 제사에 쓰일 음식을 상에 올리고 검사했었던 곳이다.
제사용 우물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들여다보니 우물 바닥이 보였음에도 꽤 깊다고 느껴졌다.
전사청을 등지고 나오는데 근사한 산사나무가 그늘을 내리고 있었다. 이제 곧 하얀 꽃을 피우고 가을에 붉은 열매를 맺을 이 나무의 생이 아름답기도 슬프기도, 화려하게도 고통스럽게도 느껴져 한참을 바라보았다.
재궁은 임금과 세자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며 제사를 준비했던 공간이다.
준비를 마친 왕과 세자는 정전으로 향했을 터였다. 관람 동선도 이곳부터 시작했어야 했나 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제례 용품을 보관하고 제관들이 대기하던 장소인 향대청 남쪽에 자리한 망묘루는 임금이 잠시 머물며 앞선 임금들의 공덕을 기리던 곳이다. 뒤쪽으로 공민왕 신당이 있었는데 조선의 왕들을 모신 종묘에 고구려의 왕이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향대청 일원 근처에 연못 하나가 더 있었다. 임금의 혼을 모신 종묘의 연못에서는 생물을 기르지 않는다고 한다.
외대문 앞에서 만난 연못도 왠지 썰렁한 느낌이 들었었는데 그런 이유에서였나 보다.
연못 근처, 하얗고 탐스런 목련이 송이 하나 땅에 떨구지 않은 채로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하얀 장미 혹은 풍성한 튤립인 듯도 보이는 꽃의 수백 송이를 거대한 꽃다발로 만들어 파란 도화지에 그려놓은 작품 같았다.
어느 고궁보다 더 고요했던 종묘는 고인들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절제되어 있는 모든 것이 신비롭고 엄숙하다.
연못에 생물을 키우지 않는 그 마음이라면 종묘는 겨울이 가장 잘 어울릴까?
활엽수의 잎들이 다 떨어지고 가지만 남아 있는 황량한 겨울은 너무 쓸쓸할 것 같다. 눈이라도 소복이 쌓여 정전과 영녕전을 감싼다면 모를까.
여리고 은은한 오늘의 종묘가 참 좋다.
생기로 가득 찬 이 성실한 봄은 선조들이 후손들에게 남기는 응원의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다음 방문 시에는 매년 5월과 11월 봉행된다는 제사의 경건한 모습을 종묘제례악과 함께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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