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앞으로 주말이 있어 여유로운 연휴다.
추운 겨울바람이 걱정되었지만, 한낮에는 다닐만하겠다 싶어 고궁 나들이에 나섰다.
오늘은 두해 전 단풍구경을 갔었던 창경궁이다.
창경궁
월요일 휴무인 고궁은 연휴기간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이른 시간이지만 궁을 찾은 관람객들도 꽤 있었다.
서울대학교 병원 앞에 자리한 중층의 홍화문이 묘한 느낌을 주었다.
옥천교 너머로 명정문과 명정전이 한눈에 보였다.
궁궐에 남아있는 다리 중 원형이 잘 보존되어 보물이기도 한 옥천교 아래로는 물이 얼어 눈이 쌓인 것처럼 보였다.
명정문을 통과하니 조정에 놓인 품계석이 종렬을 맞추고 있었고, 오랜 세월을 지나 온 창경궁의 정전이 품위 있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명정전은 현존하는 조선의 정전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오래된 건물답게 명정전 내부도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천장 중앙을 올려다보니 경복궁과 덕수궁 정전에서 보았던 용 장식 대신 아름다운 한쌍의 봉황을 볼 수 있었는데 한결 부드럽고 아름다워 보였다.
명정전 양 옆에는 커다란 청동그릇이 소화기처럼 놓여 있었다.
명정전 뒤 좌측으로, 성균관 유생을 접견하기도 시험하기도 했다는 숭문당이 있었는데 '문을 숭상한다'는 의미의 이곳이 어쩐지 애잔하게 보였다.
몇 개의 전각들을 둘러보다 정자처럼 생긴 건물 하나가 눈에 띄었다.
함인정은 국왕이 신하를 만나거나 경연을 하기도 했던 곳이다. 동궐도에는 지금과 달리 삼면이 막혀 있다고 한다.
함인정 사면에는 사계절을 노래한 시인 도연명의 사시(四時)가 걸려있다.
소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에서 주인공 진솔과 건이 밤의 궁 데이트에서 머물렀던 공간이 바로 이곳이었다.
옆에서 찰칵~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건이 라이터를 켜 정자 내부에 걸린 현판을 비춰보는 중이었다. 동서남북 방향으로 네 개의 현판이 라이터 불빛 속에 차례로 드러났다. 다섯 글자씩 새겨진 한문을 그가 중얼거리듯 읽어나갔다.
春水滿四澤(춘수만사택) 봄비에 연못의 물은 가득하고
夏雲多奇峯(하운다기봉) 여름엔 구름이 봉우리를 만든다.
秋月揚明輝(추월양명휘) 가을 달빛은 휘황하게 빛나고
冬嶺秀孤松(동령수고송) 겨울 고개엔 외로운 소나무가 우뚝하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_이도우>
실제 존재하는 장소를 콕 집어주는 소설을 만나기는 그리 쉽지 않은 듯하다. 그런 이유에서 인지 모르겠지만, 드라마나 영화의 촬영 장소를 찾아가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이도우 님의 이 소설은 서울 도심의 곳곳을 더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冬嶺秀孤松(동령수고송) "겨울 고개에는 외로운 소나무가 빼어나도다"
옛 시인의 노래처럼, 한 겨울 고궁에서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소나무였다.
둥치가 굵은 고송들은 제각각 다른 모양으로 구부러져 있었고, 나무마다 조금씩 다른 색의 거칠고 굵은 껍질을 입고 있었다.
마르고 황량한 겨울나무 사이, 초록의 빛을 잃지 않고 강건하게 서 있는 소나무들은 고궁과 어우러지며 황홀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내전 깊숙한 곳 남향으로는 통명전과 양화당이 나란히 서 있었다.
왕비의 침전인 통명전은 마당에 깔린 박석 때문인지 정전 느낌이 나며 여느 내전과는 달라 보였다. 지난번 방문 시 이곳 기단 위에서 국악음악회가 열렸던 것이 기억났다.
뒤뜰 샘이 넘쳐 마당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건물 서쪽에 연지라는 연못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침전 옆 연못도 독특했다.
정조가 태어나기도, 혜경궁 홍 씨가 승하하기도 했다는 경춘전.
사도세자가 정조를 낳기 전에 용이 이곳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벽에 용 그림을 그려 두었다고 하는데 내부는 볼 수 없었다.
건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북쪽에 위치한 전각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곳은 경춘전이었고 뒤로는 상록수들이 담장까지 빽빽이 들어서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_이도우>
경춘전 뒤쪽 숲 너머에는 창덕궁 후원으로 통하는 길이 연결되어 있다.
어느 해 가을, 환상적이었던 단풍이 연못 주위에서 반짝였던 춘당지 쪽으로 걸었다.
겨울의 춘당지는 추위에 얼어 있었고, 화려했던 주변 나무들은 휑하고 쓸쓸했다.
대온실 쪽으로 걸어가다 언덕 위에 정자 하나를 발견했다. 궁금해 올라가 보니 활쏘기나 말타기 연습 등을 했던 곳이다.
언덕 위에서 하얀 온실 건물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따뜻한 온실 안을 구경하고 출구로 내려오던 중 회화나무 몇 그루를 발견했다. 그중 선인문 근처의 하나는 심하게 뒤틀리고 껍질이 갈라져 속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뒤주에 갇혀 죽어간 사도세자의 비극을 지켜보았던 이 나무는 안타까운 죽음에 괴로워하며 온 몸으로 함께 고통을 나누었나 보다. 생명을 가진 나무는 위대하다.
사도세자의 비극을 떠올리며 고궁 나들이를 마무리했다.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길은 겨울 답지 않게 햇살이 따스하게 느껴졌고 가볍게 운동한 느낌도 들어 상쾌했다.
22년 첫 달의 마지막 날을 의미 있게 보낸 것 같아 뿌듯했고, 설날로 시작되는 2월도 최선을 다해 살아갈 에너지가 충전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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