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옆자리.
남자와 마주 앉은 여자는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목소리는 높고 약간 흥분되어 있다. 직장 내 부당한 일들에 지친 듯했고, 팀장이라는 사람의 험담이 길게 이어졌다. 마주 앉은 남자는 말없이 듣기만 한다. 간혹 "알 수 없다. 알 수 없어" 같은 짧은 추임새를 덧붙일 뿐, 말투가 무덤덤하다. 여자는 자신의 이야기에 몰두한 나머지, 남편의 반응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다. 말은 일방적이고, 그에 대한 반응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어떤 의미 있는 성과도 없이, 두 사람은 카페를 나섰다.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고 했던가. 귀는 열고 입은 닫으라고 했던가. 남편은 이 말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걸까. 내가 느끼기에 남편의 태도는 단지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보였다. 드물게 나오는 반응에서도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알 수 없고, 여자는 함께한 시간만으로도 위안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대화는 아니었다.
[어느 날 그는]
"말로 해 제발. 말로 안 하는 이유가 뭐야?" 민화는 울부짖는다. 그러나 태식은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말이 아닌 거친 행동으로 나타나는 감정의 표현들이 그에게서 민화를 멀어지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어떤 침묵은 상대를 낙담시키고 병들게 한다.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 말해봐야 다툼밖에 되지 않을 거라는 짐작, 혹은 그저 반응하기 귀찮아 침묵한다.
때로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상처이기에, 혹은 잊고 싶은 기억이기에, 마음 한편에 둔 채 표현하지 않는다.
말로 하지 않은 것, 말할 수 없었던 것들로 오해와 앙금이 생기고 관계의 공백은 깊어진다. 그리고 벌어진 틈은 시간이 지나도 메워지지 않는다.
212 그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그가 그렇게까지 화를 낸 까닭은 싸움의 발단이 된 사소한 갈등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마다 그에게 실망하며 몇 발짝씩 뒷걸음질 쳐가는 그녀 자신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231 그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무엇을 그렇게까지 잘못했단 말인가? 얼마나 큰 잘못에 대한 벌로 그녀는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 그러나 이제 병원에서 그는 그녀를 이해했다. 잠들어 있는 그녀의 까칠한 얼굴을 매일 밤 대하는 동안 그의 몸속에서 불타던 분노와 증오는 차츰 사그라들었으며, 애정 역시 천천히 식어갔다.
대화와 반응을 애타게 기다린 사람도 , 침묵을 고집한 사람도 결국은 상처를 입는다. 사랑에 빠지는 건 찰나고, 마음이 식는 것 역시 한순간이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완전히 알 수 없기에,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해 나아가는 방법이 대화 아닐까.
하지만 말은 때로 가시가 되어,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딜레마다.
[내 여자의 열매]
<채식주의자>의 기반이 되었으리라 짐작되는 이 짧은 소설은, 김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 생각이 나기도 했다. 결혼과 출산 후 살림과 육아에 매달리는 지영의 삶은 평범해 보이지만 그녀가 겪는 고통과 마음의 병은 컸다. 착한 남편 대현이 있었지만 그는 그녀의 문제를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적극적인 반응과 대처가 있었다면 지영은 병들지 않았을까.
p. 25 지난 삼 년은 나에게 가장 따뜻하고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힘에 버겁지도 못 미치지도 않는 직장 일, 다행히도 무심하여 전세금을 올려 받지 않는 집주인, 만기가 가까워 오는 아파트 청약금, 별다른 애교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 충실한 아내까지, 모든 것이 적당히 덥혀진 욕조의 온수처럼 찰랑거리며 내 고단한 몸을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생활 속에서도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아가던 남자는, 온몸에 푸르스름한 멍이 번지고 날이 갈수록 외로움에 갇히는 아내를 보며 가엾고 애틋한 마음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평온을 함부로 깨뜨리는 아내의 예민함에 깊은 염오감을 품는다.
그녀의 문제를 알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남자. 그녀의 쓸쓸하다 못해 차갑게 느껴지는 마음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외면한 남자. 그녀의 말을 흘려듣고, 그녀의 자유를 향한 날갯짓을 한낱 허망한 장난쯤으로 여긴 남자.
그가 내민 손은 형식적이었고, 자기중심적이었으며, 배려를 가장한 배려였다.
그녀의 문제가 무엇이었을까. 그녀가 꿈꾸는 자유란 무엇이었을까. 조금 더 진지하게 대화하고 반응하고 행동했다면 그녀는 삶을 지속했을까. 결국 울부짖어도 침묵으로 돌아오는 반응에 지쳐, 그녀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평안을 얻는다.
고통을 언어로 온전히 표현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타인의 고통에 무심한 사회, 그 외면의 현실 속에서 소통은 더욱 어려워진다. 이 소통 불가능한 세상은, 안과 밖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아기 부처]
선희는 상협의 온몸에 있는 화상 흉터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평생 숨기고 싶었을 알몸을 보여준 용기, 자신을 신뢰해 준 데 대한 고마움, 그리고 완벽한 그에게서 약함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고 믿었고 결혼을 결심했다.
그녀는 그의 몸이 추하게 느껴질 때마다 더욱 친절하게 대했고, 그의 성마른 성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정을 붙이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잘 해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삼 년의 결혼 생활을 지속하는 사이, 두 사람은 서로를 타인 대하듯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몸을 피했고, 그는 그녀를 무시했다.
그의 외도를 알게 된 후, 선희는 상처받기보단 오히려 안도했다. 그에게 더 바라는 것이 없었으므로.
p.112 뒤이어 나에게 엄습해 온 것은 더욱 뜻밖의 것으로, 마치 강한 파도가 가슴을 치는 듯한, 여름 한낮에 한 바가지 냉수를 뒤집어쓴 것 같은 후련함, 후련하다 못해 일말의 자유까지 느끼게 해주는 통쾌함이었다.
p.134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나는 그의 흉터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이제 그 흉터 때문에 그를 혐오하고 있었다. 그의 흉터가 다만 한 겹 얇은 살갗뿐이라는 것을 나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다는 것이 내 마음의 얇은 한 겹까지 벗겨내주지는 못했다.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죄가 있다면 모두 나의 것이었다.
상협의 젊은 애인은, 그의 흉터에 대해 알게 된 후에도 그를 존경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p. 122-123
그에게 상처를 줄 것이 분명한 말을 꺼내기 위해 나는 망설였다. 말해야 한다. 나는 다짐했다. 망설이지 않고 지금 물어야 한다.
"당신 몸, 그 여자가 알아?"
"말했잖아, 그 애는 당신 같지 않을 거야."
"나 같은 게 어떤 건데?"
그가 마침내 고함을 질렀다.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겠어!"
우아하고 세련된 모습의 그 젊은 여자는 상협의 몸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다시 무너졌고 선희는 그의 약함을 다시 마주한다.
그녀는 알았다. 자신은 그의 반의 반만큼도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p. 144 내가 분노한 것은 바로 그렇게 몸뚱이를 둥글게 말고 누워있었던 자 자신에게였다.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은 나 자신이었다. 만일 그것이 타인이었다면, 나는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
선희는 아기부처를 보기 위해 길을 떠나는 꿈을 반복해서 꾼다. 진흙으로 빚어진 아기부처를, 다시 자기 손으로 주물러 만든 얼굴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몰려들었다. 눈꼬리가 위로 찢어진 데다 음흉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린 얼굴은 도저히 아기 부처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무리 진흙을 주물러 보지만 더 사나운 얼굴이 될 뿐이었다.
p. 147 지겨운 것, 지긋지긋한 것. 신발을 뗄 때마다 얼굴은 보란 듯이 되살아나 있었다. 땀 흘리는 나를 빈정대듯 입꼬리를 치켜들고 있었다.
오래 묵은 분노와 후회와 증오, 억울함과 차책과 부끄러움을 짊어진 채로 그녀는 더 나아갈 수 없었다.
풀지 못한 감정들, 쌓인 미움들이 있는 한, 그녀는 결코 자비로운 아기 부처의 얼굴을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다.
p.120 내 살아온 동안 쌓아온 것들이 고스란히 내 병이야.... 이제 와서 보니 후회가 되는구나, 한평생 칼을 품고 살아왔던 것 같으니.
p.148 그 스님이 그러더라. 관세음보살은 내 속에 있다고. 내 몸이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득해지면 그게 바로 관세음보살이라더라.(.....) 용서라니. 마치 쇠붙이로 만들어진 사람처럼 평생을 꼿꼿이 살아온 어머니는 어디에 용서하고 말고 할 것들을 쌓아두고 있었나. 후회가 된다...... 다 후회가 돼.
그녀의 꿈에 더는 아기부처가 나타나지 않았다. 춥고 시렸던 계절은 지나고, 어린싹 같은 연푸른 빛 색이 드러난다.
p. 174. 겨울에는 견뎠고 봄에는 기쁘다.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치유하는 과정 없이 관계의 지속은 어렵다. 통증은 외면하기보다 달래는 것이 필요하다. 쌓아둔 마음을 풀고, 공감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벌어진 틈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고, 우리는 그저 일상을 함께 견디며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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