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두 번째 소설집 <내 여자의 열매>는 표제 소설을 시작으로 중단편 여덟 편이 실려있다. 하나의 제목 안에 담긴 각각의 이야기들이 소설의 분량과는 다르게 오래도록 마음에 머물렀다.
소설들은 아프고 쓰리다. 상실과 고통으로 얼룩진 인생은 너무 거대한데, 삶에 스미는 희망은 고작 한 줄기 빛 일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회복하는 인간, 나아가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철길을 흐르는 강]
p. 342 그 겨울의 밤에 두 번째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지. 이제부터 새 목숨으로 살아가야 할 몇십 년의 시간은 지나치게 길게 느껴졌지. 그동안에도 대체 몇 번을 더 돼 태어나야 할지 짐작할 수 없었어. 그러기 위하여 그때마다 다시 죽어야 할 일이 막막하고 두려워서, 이미 희끗희끗 헐기 시작한 입술 안쪽을 떡니로 물고 있었지.
p. 362 구원은 없어. 이곳에 구원은 없다구. 모르겠어?
떠나기 전에는 없어..... 이곳에서 구원을 바란다는 게 미친 짓이었어.
떠나야만 숨을 쉴 수 있는 삶. 그렇게 다시 태어나는 인생의 고단함.
앞으로 몇 번을 죽고 돼 태어날지 모르는 두려움을 견디며, 또 나아가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여주인공 지안이 자신의 나이는 '삼만 살'이라고 하는 장면이 생각난다. 무수히 돼 태어나 견디는 삶을 산다면 삼만 살쯤 될까.
p. 371 아무것도 들쑤시거나 캐어내서는 안 돼. 들쑤시고 캐어내지 않은 그 뜨거운 불길들이 어느 사이에 열기와 숨 막히는 냄새를 버리고 순연한 빛 덩이로 떠오르도록 하는 거지. 고통이 뷰파인더와 내 몸뚱이를 관통해 맑은 슬픔이 되는 절차를 잠자코 바라보기만 하는 거야. 지금 내가 당신을 생각하는 격렬한 마음이 차츰 슬퍼지고, 애절해지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성스러워져서, 어느덧 당신으로부터 묵묵히 떠나갈 것처럼..... 표제는 '나의 옥상'이라고 붙이고 싶어.
눈물 고이게 저릿한 일이 있을 때 나를 위로해 주는 건 책과 영화만 한 게 없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직접적인 대사나 장면 등으로 감정을 끓어 올리려 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들쑤시거나 캐어내는 건 울음도 위로도 주지 못한다. 나에게는 그렇다.
내가 영화 평점 5점을 주는 기준은 나의 눈물이다. 별다른 장면이 아님에도 울컥 나를 울리는 영화라면, 완성도가 떨어지는 영화일지라도 나의 5점 영화다. 그런 것들이 위로가 된다. 아마 소설 속 여자가 말한 '맑은 슬픔'이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흰 꽃]
아버지의 죽음 후, 어머니마저 잃고 잡지사와 방송국 등으로 직장을 옮겨 다니며 일만 하던 여자는 빛을 갈망한다. '열두 덩이의 태양이 폭넓은 강의 물살을 에워싸며 떠오르는 꿈'을 꾼 그 새벽 이후 그녀는 제주로 떠난다.
p. 321 다만 이상한 일은, 그 무의미한 일들만을 한 달 남짓 반복하고 나자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내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p. 322 유전자의 일부가 바뀐 사람처럼, 마치 유전자 속에 그 봄날 제주의 햇빛이 들어와 박혀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제주에서 본 고즈넉한 풍경들, 노랗고 하얀 꽃들, 정겨운 사람들.... , 그녀가 경험한 소박한 일상을 통해 그녀 안에도 맑고 화려한 웃음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갈망했던 그 흰 빛.
흰나비, 흰 무명 리본 핀, 흰 물방울무늬 손수건, 흰 양복에 부서지던 햇빛들은 조용히 그녀를 어루만진다.
떨어진 꽃잎 같이 밥그릇 안에 담긴 물 위로 떠오른 흰 밥풀 몇 알을 건져 먹으며 그녀는, 또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해 질 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아이의 엄마는 아빠의 대답 없는 등짝이 미워, 그의 난폭함이 지겹고 진저리가 나 집을 나갔다. 아이는 엄마를 찾아 헤매는 아빠와 함께 한 여관방에서 지낸다.
향긋한 라일락 냄새를 풍기던 엄마는, 강한 사람인 줄 알았던 아빠가 우는 모습을 보고 그가 좋아졌다고 했었다. 아빠는 엄마를 만나 다른 인생을 살려고 노력했고, 두 사람은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 줄만 알았다.
p. 82 인제는 나도 옛날 같지 않어..... 세상천지에 겁날 게 없었던 내가 씨발, 겁쟁이가 됐다구.
그게 왠지 알아? 너 때문이야, 알기나 해? 니가 날 겁쟁이로 만들었다구. 모든 게 변해 버렸다구.
그러나 엄마와 아빠는 이런저런 이유로, 오해로, 술과 폭력으로 다투었고, 아이는 몸을 구부려 작게 만든 채 조용히 그 곁에서 견디고 있었다.
p. 91 엄마가 떠났다는 것에 대한 실감이 없었고, 그렇다고 아주 떠난 게 아니라 곧 돌아올 것이라고도 희망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아이는 모든 일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저 생겨난 일대로 숨소리를 크게 내지 않고 견디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여관방에서 외롭게 지내던 아이는 어느 날 일몰을 봤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 만났던 사납던 개들이 해 질 녘 어떤 기분일까 생각해보곤 했다. 개들도 붉은빛이 드리운 하늘 아래서는 조금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함께 걸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아이와 함께 죽을 결심을 했던 아빠는, 땅콩잼 바른 식빵을 아이에게 건넨다. 한 입 베어 물자 아빠는 샌드위치를 낚아채고 아이를 토하게 한다. 내가 잘못했다 태련아.... 내가 잘못했다!
p. 98 아빠의 손가락이 헤집어놓은 목구멍이 빠근하게 아파온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빠가 밉지 않다. 대신 아빠가 목놓아 울던 모습을 생각하자 가슴이 서늘하게 저며온다. 그 낯선 통증이 아이의 발을 자꾸만 땅에 끌리게 한다.
p. 98 엄마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그것이었을까, 아이는 생각한다. 어린애들처럼 들먹이는 아빠의 어깨를 올려다보면서 괜찮아요,라고 말해주고 싶던, 그 찢어지는 것 같던 마음이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아빠의 약함을 보고 그를 좋아했다던 엄마처럼, 태련이는 아빠에 대한 연민으로 돼 태어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게 한 고비를 넘긴 후, 또 버리고 견뎌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
p. 99 해 질 녘의 개들이 어떤 기분일지 아이는 궁금하지 않다. 너무 아팠기 때문에 오래 외로웠기 때문에, 아이에게는 이 순간 두려운 것이 없다. 까끌까끌한 바람이 아이의 빨갛게 젖은 얼굴을 흝어 내린다. 꽃핀 아래 흩어진 머리털이 석양에 물들며 헝클어진다.
하늘에 번지는 붉은빛을 보며 설렘을 느끼고, 해 질 녘 개들의 기분을 궁금해했던 아이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상황에 삶이 소진되어 소멸 직전의 상태에 이른다. 그녀의 발걸음은 어디로 향하는 걸까. 유독 이 소설의 결말에서는 아이의 회복에 확신이 들지 않아 슬퍼졌다. 두려운 것이 없어 삶을 지속할 것인지, 삶을 마감할 것인지 말이다.
p. 382 해 질 녘 들개들이 보이는 날 선 처연함처럼 생은 그리 쉽게 부드럽고 순해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손에 죽을 수도 있었던 순간을 통과하며 아이는 체념하듯 끝내 길들여지지 않을 생을 받아들인다. (해설_ 강지희 문학 평론가)
평론가의 해설을 읽고, 마지막 문장을 여러 번 읽어 보았다.
태련이에게서 어떤 독한 다짐 같은 것도 느껴졌다. 모순적이게도, 아이가 감당하기에 너무 큰 고통이 다가올 삶에 맞설 용기를 주었을지 모르겠다.
[붉은 꽃 속에서]
p. 284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동안 그는 그의 몸속에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많은 기억들이 들어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감정에 육체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후회나 슬픔, 분노는 물론 사소하고 자질구레해 보이는 감정들에까지 구체적인 생김새와 감각이 있었다. 신기한 것은, 순서 없이 떠오르는 그 기억들 속에서 어떤 감정이 솟아났을 때 그것을 잠자코 들여다보고 있자면, 그래서 그 감각과 생김새를 찬찬히 헤아리고 나면 어느 사이 그것이 사라져 있곤 한다는 것이었다. 사라지고 난 밝고 빈 마음속에서 그는 잠시 쉬었다. 다시 기억이나 감정이 솟으면 그것을 들여다보았고, 사라지고 나면 다시 쉬었다. 선방에서 나와 잠시 경내를 걸을 때면 보이고 들리는 것들이 폭우에 씻긴 듯 또렷해져있곤 했다.
4월 어느 날, 공원 그네 벤치에 앉아 노을 지는 광경을 지켜봤다. 한낮의 강렬함은 아니지만 이글거리는 둥근 태양이 시야를 흐릿하게 하며 온 하늘과 호수를 물들였다. 점점 건물 아래로 내려가는 둥근 해를 보면서 눈시울이 붉어지고 코가 저릿하더니 눈물이 맺히고 콧물이 흐른다. 간신히 울음을 참아냈다.
아름답게 피어 정점을 찍은 꽃잎이 한순간 스러지듯, 마냥 지속될 것 같던 인간의 아름다운 시절이 막이 내리 듯, 해는 그 빛으로 주변의 것들을 아름답게 만든 후 금세 져버렸다. "순식간이네, 금방이네."라는 주변의 말들이 귓가에 들렸다.
잠시 머무는 삶이지만, 어떤 일들을 견뎌 내는 것은 '삼만 살'쯤 된 것처럼 지겹고도 길게 느껴지기도 한다.
무수히 회복하고, 다시 태어나, 또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은 얼마나 대단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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