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위에 오리들이 여전히 평화롭게 장난치며 놀고 있다. 이제 곧 호수는 얼고야 말 텐데.... 그럼 오리들은 어떻게 하나?
호수 근처 풀숲에서 사는 건가? 그러기엔 겨울숲에서 오리를 본 적이 없는 듯하다.
 
걱정과는 달리, 오리들은 나름의 생존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야생 오리들은 날 수 있기 때문에
얼음으로 물이 막히기 전에 강이나 더 큰 수면으로, 더 따뜻한 지역으로 이동해 생존한다고 한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책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홀든 역시 그 사실을 궁금해한다.
 
"Central Park에 있는 오리들은 겨울이 오면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그는 어쩌면 시간이 지나며 사라지는 것들, 떠나는 사람들, 변해가는 세계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홀로 남겨지는 서늘함과 우울함을 짙게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잃고 어른이 된다는 것에 강한 실망과 좌절을 느끼며 말이다.
 
오리들은 결국 떠난다. 얼음 아래로 가라앉는 것도 아니고, 숲 속에 숨어버리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살 수 있는 곳으로, 견딜 수 있는 곳으로, 조용히 이동할 뿐이다.
홀든이 꿈꾸었던 ‘귀머거리이자 벙어리’ 같은 삶처럼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채.
 
p.261 그곳에서는 귀머거리에 벙어리 행세를 하며 살 참이었다. 그러면 누구 하고도 쓸데없고, 바보 같은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말이다. 누구라도 내게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종이에 써서 보여주어야 할 것이었다. 
 
 
 
그는 동생 피비에게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라고 한다. 
호밀밭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그저 조용히 지켜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낡은 밀짚바구니를 들고 다니던 순수한 수녀들의 미소를 좋아했던 홀든 역시, 언젠가는 어른이 되어가며 조금씩 변해갈 것이다.
그럼에도, 그 순수했던 시절의 잔광은 어떤 형태로든 그를 지키고 비춰줄 것이다.
 
마치 얼어붙은 겨울을 건너 봄이 오면 다시 호수로 돌아와,
작은 포말을 일으키며 미끄러지듯 헤엄치는 오리들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생을 이어가는 것처럼.
 
 
 
홀든이 여동생 피비에게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말한 것은,
아마 지나가는 한 아이의 노래 가사가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에는 사회와 체제, 권위와 체면이 강요하는 질서에 대한 은근한 반항이
부드러운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어, 무겁지 않으면서도 조용히 힘을 발휘한다.
 


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를 만난다면_로버트 번스


오, 제니는 온통 젖어 있네, 가엾은 아이,
제니는 좀처럼 마를 날이 없어.
호밀밭을 가로질러 오다
치마를 다 적셔버렸지.

누군가가 누군가를
호밀밭에서 만난다 해도,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입 맞췄다 해도,
그래서 누가 울어야 할까?

누군가가 누군가를
숲골짜기에서 만난다 해도,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입 맞췄다 해도,
세상이 다 알아야만 할까?

오, 제니는 온통 젖어 있네, 가엾은 아이,
제니는 좀처럼 마를 날이 없어.
호밀밭을 가로질러 오다
치마를 다 적셔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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