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의 소설은 매 해 다시 읽게 된다. 올해가 가기 전, 한 권 더 하는 마음으로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었다.

 

소설집 마지막에 자리한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이 마음에 깊게 남는다.

어린 시절 부모의 버림을 받고 한 가족의 식모로 일했던 기남. 그녀는 딸(진경)이 하나 있는 유부남과 결혼하고, 둘째 딸(우경)을 가진다.

 

p 298. 안사돈에게는 자신에게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이 노력한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p 306. 기남의 마음에는 사라지지 않는 방들이 있었다. 언제든 그 문을 열면 기남은 그 순간을 느낄 수 있었다. (.....)

문을 열 때마다 세부는 조금씩 사라져 갔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마음의 통증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 문을 열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차갑고 단단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여전히.

 

 

 

p 318.

 

기남은 부끄러웠다.

우경의 눈에 비칠 자신의 모습이. 그 애가 오래전 자신을 멀리 떠난 일이, 진경의 알코올중독이, 두 아이가 결국 화해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른 사실이. 

 

기남은 부끄러웠다.

남편에게 단 한 번도 맞서지 못하고 살았던 시간이, 그런 모습을 아이들이 보고 자란 것이.

 

기남은 부끄러웠다.

부모에게 단 한순간도 사랑받지 못했던 자신의 존재가, 하지만 그 사랑을 끝내 희망했던 마음이.

 

기남은 이 모든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부끄러워서. 

기남은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다시 태어나야 바뀔 일들은 결코 바뀔 수 없는 일이다.

마음을 가눌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온다.

가슴이 아리고, 코끝이 쨍하고, 눈가가 뜨거워진다.

 

부끄럽다의 사전적 정의는 "양심에 거리낌이 있어 떳떳하지 못하다."이다.

 

그러나 기남의 부끄러움은 양심의 문제도, 도덕적인 문제도 아니다. 

잘못한 일이 없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여린 마음의 결에서 오는 감정일 것이다.

 

남과 비교하면서 생긴 열등감,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슬픔, 그 슬픔을 들키는 것 자체가 또 부끄러운 마음.

그래서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내가 모자란 사람처럼 보일까 봐 스스로 숨는 감정이다. 

 

이 부끄러움은 죄책감이 아니라, 자존감이 상처 입은 자리에서 나온다.

여리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원망하고, 억울해하는 대신,

스스로를 탓하고 부끄러움으로 감정을 해석한다.

 

 

 

부족하지 않지만 부족해 보일까 봐 생긴 부끄러움을 느끼는 기남에게,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라고 말하기보다는, 그녀의 감정을 존종해주고 싶다.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 “그게 네 잘못은 아니야.” 

하고 위로를 건네고 싶다.

 

 

 

세상에는 아무리 애써도 바뀌지 않는 일들이 있고, 희망을 강요할 수도 없다. 그래서 사람은 슬퍼진다.

그러니 그저, 지금의 마음 그대로를 인정해 주고 싶다.

 

p 319. "부끄러워도 돼요. 부끄러운 건 귀여워요."

 

기남의 손자가 기남에게 건넨 한마디의 그 작고 연약한 순간으로,

그 작고 연약한 사람들 그리고, 나 또한 숨을 조금 고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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