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간은 강박적으로 책을 읽을 때 펜이 없으면 어딘가 허전하고 불편한 나임에도, 이상하게 그녀의 소설을 읽을 때만은 밑줄이 거의 늘지 않았다.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이미지처럼 다가와, 특정 문장에만 밑줄을 긋는 대신 한 편이 끝날 때마다 그 이야기 전체에 밑줄을 긋는 느낌이었다.
각각의 단편은 짧은 영화처럼 느껴졌고, 그것들을 한데 모아 옴니버스 형태로 만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결국 가족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가족이라는 연대 안에 묶여 서로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지만, 또 이내 연민과 사랑을 동시에 느끼는 질긴 인연.
뒤늦게 알게 되는 부모의 세월, 자식들에게 했던 행동에 대한 뒤늦은 후회. 혹은 끝내 알지 못한 채 남겨지는 것들.
같은 공간에 있어도 서로 다른 언어를 말하는 부부의 고독,
그리고 결혼으로 맺어진 다양한 관계 속에서 감내해야 하는 수많은 감정들은 종종 서로의 살을 깎고 피를 말린다.
부모가 되기도, 자식으로 살아가기도 쉽지 않은 세상.
누군가를 돌보고 책임지고 희생해야 하는 끝없는 고리 속에서 인간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서로에게 상처를 남긴다.
마치, 자신이 낳은 새끼를 먹어 치우는 바다 물고기처럼.
그렇게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마음에
끝내 메워지지 않는 하나의 구덩이를 남긴다.
p. 205 구름 한 점 없이 파래서일까. 하늘은 구덩이였다. 깊이도, 넓이도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구덩이. 저 구덩이는 누가 팠을까. (구덩이)
늦었지만, 후회이지만, 그럼에도 화해를 시도하는 인간의 여린 마음을 나는 좋아한다.
잠시라도 그런 마음에 머물 수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다시 이어갈 수 있는 존재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그 마음을 다시 빚어야 하는 시간인지 모른다.
국수
p 44. 그래요, 지금은 반죽의 시간입니다. 분분 흩날리는 밀가루에 물을 한 모금 두어 모금 부어가면서 개어 덩어리로 뭉쳐내야 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부르튼 발뒤꿈치 같을 덩어리가 밀크로션을 바른 아이의 얼굴처럼 매끈해질 때까지 이기고 치대야 하는 시간이요.
p. 51. 어쩌면 나는 빚을 갚는 심정으로 반죽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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