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믿다>

 

 

p 45. 동네에 단골 술집이 생긴다는 건 일상생활에는 재앙일지 몰라도 기억에 대해서는 한없는 축복이다.

 

맥주를 거의 마시지 않던 내가 몇 년 전 좋아하던 수제맥주 가게 근처로 이사한 뒤로는 가끔씩 한 잔을 찾게 되었다. 가게 특유의 온기 어린 분위기와 목 넘김 좋은 맥주의 맛이 조금씩 나를 끌어당기더니, 이제는 문득 맥주가 생각나는 일이 잦아졌다.

이상하게도 그곳에만 가면 기분이 조금 들뜨고, 어떤 이야기도 괜히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그곳에서는 오래된 추억들마저 유난히 따뜻하게 떠오른다.

 

 

p 46. 이곳은 내게 오로지 기억, 기억, 기억 그렇게 속삭이는 장소가 되었다.(......) 기억이란 오지 않는 상대를 기다리는 방식이며  포즈이기도 하다는 걸 나는 이곳에서 배운다.(......) 난 사랑을 믿은 적이 있고 믿은 만큼 당한 적이 있다.

 

사랑. 사랑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인간은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사랑을 믿는가? 사랑은 끝내 지속될 수 있는가?

 

 

 

권여선의 소설, <사랑을 믿다>의 '그녀'는 실연 이후 오랫동안 깊은 실의에 잠겨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를 그 어둠의 구렁텅이에서 끌어올린 것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한 순간이었다.

 

p 58. 하지만 그 보잘것없는 것들이 상황을 바꿔놓거든. 거의 뒤집어놓는다고 할 수 있지. (......) 이를테면 친척집에 심부름을 간다든가, 업무 파트너의 경조사를 챙긴다든가 하는 것들. 그런 일들을 받아들여. 

 

p 59. 보이지 않는 건 아닌데 너무 초라하고 하찮아서 어디 한번 보자 하고 덤벼들 마음이 생기지 않는 그런 것들 있잖아. 그런 보잘것없는 것들이 네 주위에 널려 있거든. 대상이든, 일이든, 남아 있는 그것들에 집중해. 집중이 안 되면 마지못해서라도 감정이 그쪽으로 흐르도록 아주 미세한 각도를 만들어주라고, 네 마음의 메인 보드를 살짝만 기울여주라고.

 

p 75. 다만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온 것뿐인데, 삼층 큰고모님 댁에 무거운 잼단지만이 아니라 그녀를 그녀이게 만들었던 본성의 작은 칩마저 함께 두고 온 듯했다.

 

 

 

소설의 화자인 ‘나’ 또한 실연을 겪은 뒤 '그녀'를 만나 조언을 듣는다. 아마 '나' 역시 이 고통을 오래 붙들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삶이 건네는 사소한 순간들을 지나며, 혹은 단 한 번의 단순한 사건을 통해서라도.
예컨대 '그녀'를 만났던 그날, '나'는 문득 깨닫고 만다. 한때 '그녀'의 사랑을 알아보지 못한 채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져, 결국 '그녀'를 깊은 실연의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사람이 바로 나였음을.

 

p 80. 사랑이 보잘것없다면 위로도 보잘것없어야 마땅하다. 그 보잘것없음이 우리를 바꾼다.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 받아들이면 됐다.

 

p 77. 그녀는 사랑의 고통으로부터 너무 먼 어딘가로 초월해 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훨씬 더 관대하고 자연스러워졌지만 더 이상 사랑을 믿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은 나를 슬프게 했다.

 

 

 

그렇게 부르짖는 사랑은 어쩌면 지극히 사소하거나,

혹은 보잘것없어 보였던 것들이 실은 중대한 일이거나.

 

 

 

p 78. 동네에 단골 술집이 생겼다는 건 기억에 대해서는 한없는 축복이지만 청춘에 대해서는 만종과 같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