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서촌을 거닐다 책방 '오늘'에 들렸다. 그곳에서 우리는 블라인드 시집을 한 권 구입했다.

'블라인드 책 사기'는 남편의 오래된 로망 같은 것이었나 보다. 

 

 

 

 

 

시집은 하얀 종이로 정성스레 포장되어 있었고, 겉면에는 책에 대한 작은 힌트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힌트만으로 어떤 시집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포장을 뜯어보니 젊은 시인의 시집, <구관조 씻기기>였다. 힌트로 적혀 있던 시 역시 시집의 제목이자, 첫 장에 실린 시였다.

 

여름이 지나고, 짧은 가을마저 저물어가는 지금, 시집을 꺼내 들어 읽기 시작했다. 익숙한 언어로, 의식의 흐름을 따라 쓰인 듯한 시들은 여느 난해한 시들과 달리 쉽게 읽혔다. 비록 시인의 의도를 정확히 짚어낼 수는 없을지라도, 그 세계에 다가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더 친숙하게 느껴졌다.

 

 

 

혼자서 본 영화


오랜만에 그를 만났다 그와 영화를 봤다

그건 일상의 슬픔과 고독에 대한 영화였고,
가는 비가 내리는 장면이 너무 많았다

지나치게 절제된 배우의 연기가 계속되었다 그건
내 인생을 베낀 각본에 의한 것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배우의 눈썹이 화면을 가득 채웠고

영화가 끝나자 스탭롤이 올라갔다 그는 죽어 가는
군인이 휘파람을 불 때 조금 울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영화에는 그런 장면이 없었고,
내가 말해도 그는 믿지 않았다

그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저 멀리서 비옷을 입은 아이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시인의 언어로 표현된 세계를 따라가다 보니, 시의 여백 사이로 감춰진 삶의 외로움과 쓸쓸함, 그리고 고독이 한층 선명하게 다가왔고, '개종'이라는 제목의 시가 여러 편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의 시상이 많은 부분에서 종교와 신성의 문제를 관조하는 쪽으로 흐르는 듯했다.

 

 

빠르게 한 번 훑었으니, 이제는 한 편씩 차분히 들여다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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