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의 소설을 읽다 보면 가끔씩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등장인물들의 나이에 대한 정보가 없다가 불쑥 드러나는 순간, 내 예상보다 그들의 나이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봄밤> 속 영경과 수환도 그랬다.

 

이상하게도 그들의 삶과 대화는 어느 나이여도 전혀 낯설지 않다. 어쩌면 내가 그만큼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젊은이들의 이야기든, 노년의 이야기든 모두 내 삶 가까이에 와닿는 그녀의 소설이 좋다.

 

7편의 단편들이 모두 좋았다.

 

 

 

<실버들 천만사>

 

지난 주말, 공원을 산책하다 덩치가 크고 잎이 풍성한 버드나무와 마주했다.

푸른 실타래 같은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한 올, 한 올의 가느다란 실이 아니라, 한데 엉켜 타래처럼 보이는 풍성한 나무였다.

권여선의 한 단편 제목인 '실버들 천만사', '실버들 천만사'를 속으로 반복해 보았다. 아래로 길게 늘어져 여린 듯 바람에 몸을 맡기지만, 그 흔들림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사연들이 스며있는 듯했다. 나무는 강인해 보였다.

 

 

 

반희와 채운,

엄마와 딸은 관계가 좋든 나쁘든 어쩔 수 없이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반희는 살아남기 위해 어린 채운을 두고 집을 나갔던 이력이 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뒤 이혼해 집을 떠났다. 그녀는 딸이 자신을 닮을까 봐 늘 두려워했다. 그녀는 채운이 자기와는 다른 삶을 살기를, 독립된 존재로 서기를  바랐다. 

 

p. 50 반희는 채운이 자신을 닮는 게 싫었다. 둘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닮음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게 몇만 가닥이든 끊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둘 사이가 끊어진다 해도 반희는 채운이 자신과 다르게 살기를 바랐다. 그래서 너는 '너', 나는 '나'여야 했다.

 

그러나 채운은, 엄마의 바람과는 달리, 결코 그녀를 벗어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돌아오지 않던 엄마를 기다리며 맞닥뜨린 그 공허한 순간은 그녀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다. 그 이후로 채운은 폐쇄공포증을 앓으며 위태롭게 살아왔다.

 

p. 77 알아. 엄마 보면 날 사랑하는 거 맞아. 날 사랑해서 힘든 게 보여. 나도 엄마 사랑해. 그래서 힘들어. 사랑하는 게 왜 좋고 기쁘지가 않아? 사랑해서 얻는 게 왜 이런 악몽이야? 사랑하지 않으면 이렇게 안 힘들어도 되는데, 미워하면 되는데, 왜 우린 사랑을 하고 있어? 

 

 

 

그런 딸이 이번에는 엄마와 여행을 계획한다. 단 하룻밤이라도 함께 지내고 싶어서였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 나름의 화해이자, 오래 묵은 상처를 들여다보려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p. 78 두려워 도망치고 두려워 숨고 두려워 끊어내려고만 하면서, 채운과 이어진 수천수만 가닥의 실을 끊어내려던 게 채운에게는 수천수만 가닥의 실을 엉키게 하는 짓이었다면, 지금껏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온 것일까.

 

p. 79 사랑해서 얻는 게 악몽이라면, 차라리 악몽을 꾸자고 반희는 생각했다. 내 딸이 꾸는 악몽을 같이 꾸자. 우리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걸 밧줄로 꼬아 서로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자. 함께 말라비틀어지고 질겨지고 섬뜩해지자. 뇌를 젤리화하고 마음에 전족을 하고 기형의 꿈을 꾸자. 

 

결국,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반희는 달라지기로 한다. 그 변화의 움직임이 나에게 묵직한 울림을 주었다.

반희와 채운의 이야기는 특별하면서도 낯설지 않았다. 누구나 가족 안에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그들의 변화가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표제인 '각각의 계절'이란 말은, 세 번째 단편 <하늘 높이 아름답게>에 등장한다.

 

p.113 한 계절이 가고 새로운 계절이 왔다. 마리아의 말대로라면 새로운 힘이 필요할 때였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사모님.

 

살아남기 위해 완벽한 화해도, 완전한 치유도 없다. 그러나 '달라지기로 한다'는 선택 자체가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될 수 있다. 서로 다른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새로운 관계의 계절을 맞이하기 위해 힘을 내는 반희와 채운처럼.

 

결국, 각각의 계절을 건너기 위해서는 각각의 힘이 든다. 그리고 그 힘은 우리가 서로를 마주하며 조금씩 달라지려는 순간, 생겨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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