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바닥 엄지둔덕에 붉은 띠가 생겼다. 부위가 넓진 않지만, 대상포진 진단을 받았다. 고통이 심하지 않았으나 가려움과 통증, 피로감이 며칠째 이어졌다. 직장과 주말 스케줄은 평소처럼 소화했지만, 소설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소설은 너무 좋고, 다 읽고 나니 마음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었지만, 정작 내용은 선명히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다시 한번 책을 펼쳤고, 오래 머물렀다.
김애란 작가의 소설을 읽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장은 세심하고 섬세해, 사실감과 감정의 깊이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녀의 소설집 <바깥은 여름>에는 죽음과 부재, 이별처럼 아프고 쓰라린 이야기가 일곱 편 담겨 있다.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부가 한 계절을 견디는 이야기 (입동), 반려견을 떠나보내는 이야기 (노찬성과 에반), 남편을 잃고 마음을 추스리려 잠시 타지로 떠나지만, 그가 잊히지 않는 이야기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이 세 편의 소설은 상실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 낸다. 남아있는 자들의 가슴을 아프게 후벼 파고, 그들이 서있는 곳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어디선가 쩍쩍 금이 가고, 도무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p. 261 붉은 반점은 한국에서부터 내 몸에 들러붙어 영국까지 따라왔다. 기어이 같이 귀국했다. 농작물을 해치는 메뚜기떼처럼 우르르 몰려와 성실하게 내 몸을 갉았다.
젊은 커플 이수와 도화의 이야기 (건너편)는 청년들이 짊어진 어려움과 외로움이 깊게 전해져 마음이 아팠다.
오랜 연애 속에서 쌓인 실망과 좌절, 열등감,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서로를 저울질하는 부끄러운 마음까지, 그 모든 것을 지나오며 마음속에는 더 이상 애정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헤어질 수도 없는 그 애매한 상태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p. 115 나는 네가 돈이 없어서, 공무원이 못 돼서, 전세금을 빼가서 너랑 헤어지려는 게 아니야. 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 같아.
p. 117 도화는 노량진이라는 낱말을 발음한 순간 목울대에 묵직한 게 올라오는 걸 느꼈다. 단어 하나에 여러 기억이 섞여 뒤엉키는 걸 알았다.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 안에서 여러 번의 봄과 겨울을 난, 한번도 제철을 만끽하지 못하고 시들어간 연인의 젊은 얼굴이 떠올랐다.
(풍경의 쓸모)
어머니 환갑여행으로 간 태국의 바깥 풍경은 초록이 진한 여름인데, 정우가 두고 온 한국은 차가운 겨울이다.
정우는 초조한 마음으로 임용시험 결과를 기다리며 전화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집을 나간 아버지는 내연녀의 암 소식을 전하며 돈을 빌려 달라고 했고, 마음을 정하지 못한 그는 마음이 불편하다.
이국의 느긋한 여름 풍경은 정우에게 닿지 않고, 그의 마음은 매서운 겨울바람처럼 소용돌이친다.
p. 158 풍경이 더 이상 풍경일 수 없을 때, 나도 그 풍경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 순간 생긴 불안이었다.
마침내 기다리던 임용 시험 결과는 실패였고, 아버지에게서 온 부고 문자는 어떤 수사도, 채근도, 표정도,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차가운 문자였다.
자신이 누명까지 써가며 이어가던 곽교수와의 관계도, 아버지와의 관계도, 서로의 간극은 점점 더 멀어져 갈 뿐이다.
p. 182 휴대전화 속 부고를 떠올리며 문득 유리 볼 속 겨울을 생각했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정우가 태국의 햇살을 바라보면서도 마음 한편에서 겨울처럼 차갑고 무거운 고민을 놓지 못하는 모습에서, 풍경과 인간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상실과 불안 속에서도 살아가는 인간의 복잡한 심리가 느껴졌다.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들이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들이 모여 인생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경험한 모든 순간들은 결코 잊히거나 지워질 수 없다. 그 모든 것은 내 안에 쌓여 나를 만들고, 나의 인상을 새롭게 바꾼다. 어떤 상실도, 이별도, 죽음도 마찬가지다.
p. 173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종종 버스 창문에 얼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 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대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어떤 사건 후 뭔가 간명하게 정할 수 없는 감정을 불만족스럽게 요약하고 나면 특히 그랬다. 그 일 이후 나는 내 인상이 미묘하게 바뀐 걸 알았다. 그럴 땐 정말 내가 내 과거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화는, 배치는 지금도 진행 중이었다.
다 읽고 나니, 김애란의 소설은 참 모질다.
상실은 풍경처럼 늘 인간의 삶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건드려 놓고, 어떤 빛도 작은 소망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는, 그 어떤 헛된 희망이나 치유대신, 주어진 삶은 그저 온전히 받아들이며 극복해가는 것이라는 또 다른 위로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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