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짧은 소설, <봄밤>이 무척 마음을 건드렸기에, 권여선 작가의 소설을 몇 권 더 샀고, 읽기 시작했다.
총 여덟 편의 이야기가 실린 <아직 멀었다는 말>.
그 마지막에 실린 백지은 문학평론가의 해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생의 비극성에 대한 이해와 연민을 권여선의 소설에서만큼 깊게 경험한 적이 있었던가'
p. 264 권여선 소설의 인물들이 겪는 갖가지 고통은 그들 개인에게 귀속되는 불행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책임을 물어야 할 부당함, 불공정, 불평등이다._<백지은 문학 평론가의 해설 중>
'생이 비극적'인 이유는 나의 문제가 아니라, 삶 자체의 문제라는 깨달음은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녀의 소설은 그런 삶을 통과해 나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고단함과 불확실함 속에서도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느새 나를 발견한다.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아프고 저리지만, 또 반짝이는 순간들로 충실히 삶을 견뎌내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연민과 위로를 얻는다.
p. 28 어디선가 새가 날아와 나뭇가지에 내려앉았다. 날갯짓의 급격한 감속, 날개를 접고 사뿐히 가지에 착지하는 모습, 가지의 흔들림과 정지..... 그런 정물적인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새는 돌연 가지를 박차고 날아갔고 그 바람에 연한 잎을 소복하게 매단 나뭇가지는 다시 흔들리다 멈추었다. 멍하니 서서 새가 몰고 온 작은 파문과 고요의 회복을 지켜보던 그는 지금 무언가 자신의 내부에서 엄청난 것이 살짝 벌어졌다 다물렸다는 걸 깨달았다. <모르는 영역>
p. 53 버스가 좋은데, 소희는 버스가 슬프다. 그러니까 슬픈 건 버스가 아니라 햇빛인데, 슬프면서 좋은 거, 그런 게 왜 있는지 소희는 알지 못한다. <손톱>
p. 150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세상천지 N에게는 어머니밖에 없고 어머니에게는 N밖에 없다고 <너머>
p. 214 그들, 그러니까 그와 제발트는 아직 벌레가 아니고 아무리 황량한 폐허 속에서도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고 찾아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 아직은 잿빛 세상 속에 끼워 넣을 희미한 의미의 갈피를 지니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게 비록 초록빛 소주병이나 푸른 등을 단 구급차, 붉은 무생채 가닥이나 개미처럼 움직이는 간호사의 실루엣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재>
첫 번째 단편 <모르는 영역>의 주인공은 아버지와 딸이다.
아내를 잃고 재혼한 명덕과, 전처소생의 딸 다영. 두 사람은 서로가 못마땅하고, 관계는 어색하고 서먹하다.
상처를 안고 살아온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나 서로에게 불평만 늘어놓는다.
"왜 너는...", "왜 아빠는...." 말끝마다 비난이 섞인다. 그러나 이들은 그저 표현이 서툴 뿐, 서로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분명 존재한다.
명덕은 여주에서 촬영 중인 딸을 찾아가고, 다영은 아버지를 위해 안주를 사러 나간다. 그러나 그 마음은 말로 표현되지 않으면 닿지 않는다. 그렇게 오해는 쌓이고 앙금은 남는다.
해는 늘 낮달만 만난다. 환하고 빛나는 밤의 달은 끝내 알지 못한다.
그저 희미하고 어슴푸레한 낮달처럼, 우리 역시 누군가의 어설픈 면들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명확할 수 없는 인생, 이해할 수 없는 일들, 결코 알 수 없는 마음들.
어차피 그런 것이 인생이라면, 우리도 조금은 힘을 빼고 고단함과 불확실함 속에서도 기쁘게, 충실히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p. 10 낮달을 오래 보고 있자니 최면에 걸린 듯했고 문득 자신의 페인팅에도 색과 기운을 조금씩 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는 세지지 말자. 그런 생각. 조금 연해도 된다고, 묽어도 된다고, 빛나지 않아도, 선연하지 않아도, 쨍하지 않아도, 지워질 듯 아슬해도 괜찮다고, 겨우 간신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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