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귀여운 크기와 동심 어린 제목, 표지를 가진 이 소설집에는 삶의 그늘 아래 웅크린 여린 마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과장 없이 쓸쓸하고, 독자의 마음을 천천히 침잠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녀의 글에는 삶에 대한 의지와 처절한 노력들이 스며 있다. 완전히 무너져버리지 않으려는 사람들, 끝내 삶을 놓지 않으려 애쓰는 마음들이 문장 곳곳에서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돌담>
p. 42 결국 나는 나쁜 것을 나누며 먹고사는 어른이 되었다. 괜찮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괜찮겠지, 괜찮겠지, 아직은 괜찮겠지, 기만하는 수법에 익숙해져 버린 형편없는 어른.  
 
<막차>
p. 212 그렇게 많은 밤, 승지는 죄책감 다음에 오는 단어를 찾아 헤맬 것이다. 그런 밤을 살고 또 살 것이다. 막차를 탈 것이다. 
 
<수(囚)>
p. 173 착한 그들은 강요와 폭력보다 걱정과 불행으로 나를 지배했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 안개처럼 나를 에워싸고 축축하게 적셨다. 그 속에서 나는 필요 이상으로 춥고 무거워졌다. 매일 빛을 꿈꾸었다. 입자이고 파동인 빛, 자유롭고 가벼운 빛, 따뜻하고 찬란한 빛.
 
돈을 벌어야 한다.
 
囚 (갇힐 수). 사람을 사방이 막힌 공간에 가두어 둔 모습을 형상화 한 한자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무언가에 갇혀 살아간다. 외부의 힘 때문이기도 하고, 너무 깊은 슬픔이나 쓸쓸함 때문에 스스로 마음의 감옥을 만들어 그 안에 머물기도 한다.
 
 
 
<겨울방학>
p. 74 네가 내게 배운 것이 가난만은 아니라면 좋을 텐데.
p. 75 고모는 정말 가난했던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중얼거리면서 고모가 지었던 미소를 이나는 똑똑히 기억했다. 대학 다닐 때도 직장 생활을 시작한 뒤에도 가끔 그 미소를 떠올렸다. 때로는 충만한 미소로, 때로는 쓸쓸한 미소로 떠올랐다. 
 
<첫사랑>
p. 103 삶은 활짝 펼쳐진 종이가 아니라 불규칙하게 구겨진 종이다. 펼쳐진 채로는 도무지 만날 수 없는 것들이 구겨지면 가까워지고 맞닿고 멀어지기도 한다. 나는 여기 가만히 있는데, 이우미는 거기 가만히 있는데, 우리 사이에는 수많이 사람이 존재하는데,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의 빛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의자>
p. 160 등받이와 팔걸이가 부드러워 몸을 알맞게 감싸는 의자를 만들고 싶었다. 오래 앉아 있을 의자가 아니라 커피가 식을 때까지만 앉아서 쉬기에 적당한 의자를, 오후나 해 질 녘이 아니라 새벽에 어울리는 일인용 의자를 만들고 싶었다. 
p. 165 더는 욕심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인생은 늘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가난하지만 미소 지을 수 있고, 혼란의 한가운데서도 빛을 알아볼 수 있으며, 쓸쓸하더라도 잠시 쉬어 갈 의자 하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가족>
p. 137
가족은 가장 가까운 사이 아닌가?
글쎄, 태어난 순간에는 그렇겠지. 근데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무중력 우주에서 약한 힘을 받은 것처럼. 태어나는 순간 그 힘을 받아서, 만나자마자 멀어지는 거야. 서로의 한쪽면만을 보면서 서서히 멀어지는 거지.
........ 쓸쓸한 말이네.  그래도 난 너와 같이 살고 싶어.
멀어지더라도?
그래도 오늘은 가장 가까이 있으니까.
 
<어느 날>
p. 231 우주는 무한하나 시작과 끝이 있기에 언젠가 지구가 없어진다고 해도 우린 어떤 식으로든 같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우주가 생기고 없어지고 다시 생기길 반복해도 우린 영영 같이 있을 거라고 꼭 말해 줄 것이다.
 
<오늘의 커피>
p. 262 가느다란 물줄기 떨어지는 소리만 들리는 카페 깊은 곳에서 조는 멈췄던 초침이 탁 하고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스물두 살 여름, 어머니가 수술실에 들어간 그때에서 이제야 1초가 흐른 것이다.
 
< 0 >
p. 291 제목에 Earth가 들어가는 책 따윈 원래 없었다. 없는 것을 있다고 믿도 그 거짓말에 나부터 속아야 했다. 그리고 모두를 속여야 했다. 글은 그렇게 시작되었으니까. 하지만 속고 있음을 영영 잊어서는 안 되겠지. 지금은 없다. 그렇다고 영영 없으리란 법은 없다.
.........
그러려면 우선 홀로 그에게 가야 한다. 그를 만나야 한다. 만나기 위해 건물과 차와 사람 속에 뒤섞여야 한다. 무서워도 사랑해야 한다. 그러다 다시 방을 뛰쳐나와 이른 아침 버스에 홀로 몸을 싣게 되더라도.
 
어둠이 전부인 줄 알았던 이야기의 끝에서, 나는 그녀의 글 속에 남아 있는 희미한 빛을 발견한다. 그 빛은 거창한 희망이 아니라, 오늘을 견디고 내일로 넘어가게 만드는 아주 작은 동기다. 편안한 의자에 잠시 앉아 숨을 고르고, 다시 박차고 일어나 생의 한가운데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
 
그러다 보면 쓸쓸하고 지루했던 1초는 어느새 지나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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