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8 나는 더 이상 밖에 나가지 않는다. 불안감이 엄습하여 나는 밖에 나가지 않는다. 이 불안감이 엄습해 온 것은 바로 지난여름이었다.
책의 첫 문장부터 등장하는 이 불안감은 소설의 마지막까지 계속된다. 이야기는 반복되고, 그 반복 안에서 불안감은 지속된다.
불안감이 느껴진다. / 불안이 날 엄습해 오고 있다. / 불안감이 커지기 시작한다. / 불안감이 강력해지고 있다. / 내 불안감은 사라졌다. / 그런데 갑자기, 난데없이, 저물기 전보다 강력하게, 아주 분명하게, 불안감이 엄습했다. / 이제 불안감이 뚜렷해진다. 그 불안감이 내 온몸을 뚫고 지나다닌다. 뚜렷한 불안감.
불안감의 원인을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불안의 이면에는 개인적이고 은밀한 상황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불안을 들여다보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어떠한 것들이 연상된다. 이것 때문인 것도 같고, 저것 때문인 것도 같다. 작가는 이러한 인물의 내면을 독특한 방식으로 묘사한다.
p.43 그것이 이 불안감,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불안감이다. 나는 크누텐을 소리쳐 불렀지만,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고, 그냥 떠나 버렸다, 그 후로는 그를 다시 보지 못했다, 나는 이 불안감을 떨쳐 버려야 하기에 글을 쓴다, 불안이 엄습해 온 것은 지난여름이었다. 나는 더 이상 밖에 나가지 않는다. 불안이 엄습한 이후로 나는 기타에 손을 대지 않고, 음반도 더 이상 틀지 않는다. 내 왼팔이, 손가락이 아프다, 어머니. 크누텐의 아내. 노란 우비. 청재킷. 그녀의 눈. 불안감이 날 엄습해 와서 난 글을 쓴다. 기타, 내 기타가 보인다. 내가 장만한 첫 번째 기타가 떠오른다.
1부
주인공은 서른 살을 넘겼고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다. 연금을 받는 그리 늙지 않은 어머니와 같이 산다. 어느 여름 그의 친구 크누텐이 휴가를 맞아 고향집에 놀러 오게 된다. 그는 음악교사이고, 2년 전 결혼해 아내와 두 딸이 있다. 서로 고개만 끄덕여도 마음이 통했던 그들이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고향에서의 해후를 서로 불편해한다.
그들은 자신의 불안을 감지할 뿐, 서로의 마음은 짐작만 할 뿐이다.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과거의 어떤 사건들, 한 여자아이와 관련된 미묘한 감정들, 현재 상황에 대한 열등감, 아내가 남자들을 유혹하는 눈빛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온 일들.... 독자들도 그저 짐작할 뿐이다.
p.134 나는 길을 따라 걸으며 파도 소리를 듣는다. 어릴 적 들었던 그대로의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파도는 내 삶 전체를 관통해 계속 또 계속 치고 있었다. 어릴 적에 그 파도 소리를 들은 이후로는 여러 해 동안 그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이제 극심한 불안감 사이로 그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과거의 어떤 기억이 불현듯 나를 옭맬 수 있다. 주인공은 친구 크누텐과 그의 부인을 만난 이후 불안감이 시작되었고, 그는 이를 떨쳐 내야만 했기에 글쓰기를 시작했다. 집에 틀어 박혀 글을 쓰고 소설을 쓰며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는다. 기타 연주도, 어떤 돈이 되는 활동도 하지 않는다.
p.95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더 이상 내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아무도 날 보지 못하기를 바랐다. 나는 숨고 싶었고, 사라지고 싶었다, 나는 두려웠다. 난 재빨리 집으로 걸어갔고, 내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불안했고, 두려웠다, 무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불안한 것이다, 무언가 피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어떤 상황을 맞닥뜨리기 두려운 마음에 숨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일, 상황, 사람 등 피하고 싶은 것 천지다. 누구나 문을 닫아걸고 세상 밖으로 나가기 싫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컴퓨터 자판을 몇 번 두드리면 개인적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다양한 방법이 쏟아진다. 글로 읽을 때는 별거 아닌 듯 쉬워 보여도 막상 해보려고 하면 어렵다. 남들이 볼 때는 사소한 일로 여겨질 수 있는 문제도, 나에게는 생의 전체를 무너뜨리는 무기가 될 수 있다.
p.138 나는 모르겠다. 크누텐과 나, 우리는 늘 함께였다. 그런데 크누텐은 그냥 걸어가 버렸고, 나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모르겠다.
주인공과 크누텐이 과거의 일들과 현재의 상황들을 서로 터 놓고 얘기했더라면 어땠을까? 서로의 짐작만으로 불안해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둘의 관계는 회복되었을까?
2부
1부에서는 1인칭 시점으로 자신의 생각과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지배적이었다면, 2부에서는 주인공이 크누텐의 시점이 되어 그의 불안을 묘사한다. 주인공의 짐작인지 아니면 크누텐의 진심인지 모를 독특한 방식의 서술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오! 수정]이 생각났다. 1부에서는 재훈(정보석), 2부에서는 수정(이은주)의 시선과 기억으로 같은 상황이 반복될 때 그 미묘한 차이와 다름이 인상적이었었다. 우리는 타인의 마음을 결코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고 그저 짐작하고 살아갈 뿐이라는 게 어찌 보면 슬프기도 했었다.
주인공과 크누텐은 둘 다 불안하다. 상대의 마음과 진실을 짐작해 보지만, 진실을 알 수 없기에 서로를 오해한다. 누가 누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이라기보다, 그저 둘 다 그렇게 불안하고 힘들다. 관계의 어려움이다.
3부
p.210 넌 내려와야 한단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모르겠다. 이 불안감을 견딜 수가 없다. 나의 어머니, 나는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발소리를 들었다. 어머니는 그리 나이가 드시진 않았다. 이제 이 불안감을 견딜 수가 없다. 따라서 나는 내 글쓰기를 끝낸다.
주인공에게 두려움과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던 그 만남 이후, 그는 1년 남짓 세상으로 나오지 않았었다. 어머니로부터 친구 크누텐의 부인이 물에 빠져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는 글쓰기를 끝낸다. 불안감을 견딜 수가 없어서.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어떤 행동을 하지만, 그 행동은 또 다른 불안감을 낳는다. 그녀의 죽음을 마주한 그는 또 다른 불안감을 깨닫고, 글쓰기를 그만둔다. 그다음 그의 행보는 무엇일까? 다락방을 내려와 어머니로부터 독립하고 기타를 치고 경제활동을 하며 여자를 만나 결혼도 할까? 아무것도 이루지 못 한 지금의 상황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을까?
소설은 우울하다. 불안감을 극도로 느끼는 한 인간의 내면을 읽어내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개인적인 트라우마는 한 인간의 삶을 흔들리게 한다. 그것을 극복하려고 온갖 노력을 해 보아도 쉽지 않다.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불안감을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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