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작가의 소설, [봄밤] & 강미자 감독의 영화, [봄밤]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신형철 문학 평론가는 '사랑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하나의 정의를 '결여의 교환'이라고 제시한다.
 


p. 332 그의 결여가 못나 보여서 등을 돌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결여 때문에 그를 달리 보게 되는 일, 그 발견과 더불어, 나의 결여가, 사라졌으면 싶은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결여와 나누어야 할 어떤 것이 된다. 내가 아니면 그의 결여를 이해해 줄 사람이 없다 여겨지고, 그야말로 내 결여를 이해해 줄 사람으로 다가온다. (....) 바로 그것을 사랑의 관계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p. 333 사랑의 관계를 형성한다고 해서 내 결여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여가 없다는 의미에서의 완전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상대방을 통해서 내 결여와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는 있다. 내 결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 결여가 더는 고통이 아닌 생, 그런 생을 살 수 있게 된 사람을 온전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사랑은 나를 완전(perfect)하게 만들지는 못해도 온전하게(complete)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 

p. 342 그러므로 저는 사랑이란 궁극적으로 우리가 서로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사랑한다. 내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너를 살게 함으로써 나 역시 살 가치가 있게 되기 위해서.

 
이 부분에 밑줄을 치며, 권여선 작가의 단편 소설 <봄밤>의 주인공인 영경과 수환의 사랑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생각을 했다.
상대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사랑, 서로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 사랑, 서로의 결여를 주고받으며 하나가 되는 사랑,  살기 위한 사랑, 살리기 위한 사랑, 완벽하진 않지만 완전한 사랑.
 
 
 
강미자 감독의 영화 <봄밤>을 보고, 권여선 작가의 짧은 소설 <봄밤>을 사 읽었으며, 김수영의 시 <봄밤>을 필사했다. 
영화 상영 후 진행되는 GV에 강미자 감독과 신형철 평론가가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봄밤>을 다시 예매했고, 이어 그의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꺼내 다시 읽었다.
 
시네마 달 홍보팀장이 진행한 GV에서, 권여선 작가의 소설을 운명처럼 읽고 영화를 만든 감독과, 권여선 작가의 오랜 지인인 평론가가 함께한 이 조합은 필연으로 느껴졌다. 
 

 

 
알코올 중독자 영경과, 신용불량자이자 류마티스 관절염을 심하게 앓고 있는 수환. 두 사람은 첫 만남에서 서로를 알아본다.
영경은 수환의 가난과 병을 끌어안고, 수환은 취한 영경을 위해 조용히 등을 내민다.
 
p. 58 그리고 그가 조용히 등을 내밀어 그녀를 업었을 때 그녀는 취한 와중에도 자신에게 돌아올 행운의 몫이 아직 남아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의아해했다.
 
p.76 여기 사람들이 아저씨랑 아줌마 보고 뭐라는지 알아요? 이산가족 같대요. 맨날 아침마다 두 사람 만날 때면 이산가족 만나는 것 같대요. 
 
영경은 결코 알코올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수환의 류마티스 관절염도 나아지지도 않는다. 어떤 변화도 회복도 없다. 수환은 영경에게 술을 끊으라고 재촉하지 않고, 영경 또한 수환에게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서로의 끝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간다. 
 
p. 86 요양원 사람들은 수환이 죽었을 때 자신들이 연락두절인 영경에게 품었던 단단한 적의가 푹 끓인 무처럼 물러져 깊은 동정과 연민으로 바뀐 것을 느꼈다. 영경의 온전치 못한 정신이 수환을 보낼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견뎠다는 것을, 그리고 수환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죽어버렸다는 것을, 늙은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가끔 영경의 눈앞엔 조숙한 소년 같기도 하고 쫓기는 짐승 같기도 한, 놀란 듯하면서도 긴장된 두 개의 눈동자가 떠오르곤 했는데, 그럴 때면 종우가 대체 무슨 일이냐고, 왜 그러느냐고 거듭 묻는데도 영경은 오랜 시간 울기만 했다.
 
짧디 짧은 소설 한 편이지만, 그 안에는 무겁고 깊은 세계가 펼쳐져 있다. 단정하고 건조한 문체는 오히려 더 진하게 가슴을 울린다. 짧음이 주는 여백은 생각을 불러내고, 그 여백 속에서 사색과 성찰의 시간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영경(한예리)과 수환(김설진)은 소설의 인물을 더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두 배우의 열연도 무척 인상적이다.
나에겐 두 사람의 포옹이 오래 기억에 남는데, 서로를 꼭 껴안은 모습은 마치 서로의 상처를 싸매고, 각자의 결여를 흡수하는 몸짓 같았다.
 
 
김수영의 시, <봄밤>은 책과 영화의 깊이를 더해준다. 

봄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는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GV에서 신형철 평론가는 술에 취한 영경이 주문처럼 김수영의 <봄밤>을 읊조리는 장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시는 시이고, 영화는 영화라는 측면이 있다. 내용과 상관없이 어떤 시 구절은 그저 중얼중얼하는 것만으로도 주문 같은 효과가 있을 수도 있겠다.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영경이, 견디며 더 나아가기 위해 의지하는 주문과 같은 것이 아닐까."

 
 
나 또한, 봄밤에 푹 빠져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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