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에 돌란 감독의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를 봤다. 세 번을 연달아 봤다. 그리고 또 보고 싶다. 이런 영화는 처음인 듯싶다.

마침 얼마 전 읽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과 맞닿아 있는 영화였다.

 

권여선의 소설 <봄밤>에는 알코올 중독자인 영경과 신용불량자이자 류마티스 관절염을 심하게 앓고 있는 수환이 등장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결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결여마저 상대와 나눈다. 서로를 바꾸려 하지도, 자신을 바꾸려 하지도 않는 두 사람의 사랑은 눈물겹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사랑이란 우연히 빠져드는 감정이 아니라, 나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끊임없이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기술이라고 말한다.

 

p. 38 공식적 합일과는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에게서 분리하는 벽을 허물어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하는 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 성립한다.

 

p. 162 사랑은 자아도취의 상대적 결여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사랑은 겸손 객관성 이성의 발달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러한 목적에 전 생애를 바쳐야한다. 겸손과 객관성은 사랑이 그런 것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나는 이방인에게 객관적일 수 없는 한 나의 가족에 대해서도 참으로 객관적일 수 없으며 역도 진이다.

 

말이 조금 어렵지만, 자아도취의 상대적 결여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는 태도일 것이다. 나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서 벗어나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비로소 겸손과 객관성,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해진다. 나의 생각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겸손함으로 상대의 행동을 바라본다면, 그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존중하며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에게는 이런 사랑의 태도, 사랑의 기술이 있는가?

나름대로 노력하며 살아간다고 해도 여전히 세상은 내 중심으로 돌아간다. 자아도취에서 벗어나기보다 자아도취가 지배하는 순간을 더 많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 두 사람의 사랑이 있다.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는 너무나 아름답다. 다양한 감정을 시각적으로 구현해 내는 화면도 아름답지만, 무엇보다 로렌스와 프레드의 사랑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물론 두 사람은 서로의 다름을 끝내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랑하지만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며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상대의 다름을 받아들이기 위해 사랑하고, 화내고, 받아들이려 애쓰고, 밀어내고, 그리워하고, 다시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프레디의 모습이 무척 아프게 다가왔다.

 

프레디에게는 프레디의 삶이 있었고, 로렌스에게는 로렌스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한 삶이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와야 했다. 하지만 영화는 그것을 두고 '그러므로 그 사랑은 실패했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떨어져 나갔다고 해서 함께했던 시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두 사람의 이별과 함께 하늘에서 떨어지는 낙엽은 더없이 아름답지만, 동시에 아프다. '우리가 결국 함께하지 못했다'는 슬픔과 '그래도 우리가 사랑했던 것은 분명히 존재했다'는 위로가 동시에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나는 나 자신으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일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만든다면?

프레디는 로렌스를 사랑한다. 하지만 로렌스가 원하는 삶을 받아들이는 것과 그 삶을 자신도 함께 살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상대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해서, 상대가 선택한 삶을 나 역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를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모습으로 바꾸는 일일까, 아니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모습까지도 사랑하는 일일까?

프롬이 말하는 자아도취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나 자신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다. 나 자신만큼이나 상대 역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프롬은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로렌스의 개성만큼이나 프레디의 개성도 중요하다. 로렌스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면, 프레디에게도 자신의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한 사람의 삶을 존중한다는 이유로 다른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어쩌면 사랑은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 성공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끝내 함께 살아갈 수 없더라도, 상대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과 나 자신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마음 사이에서 오래도록 애쓰는 것. 그 시간 역시 사랑의 일부일 것이다.

 

책과 영화는 사랑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진다.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타인을 이해하고 존중한다는 것은 어디까지 가능한 일인지, 그리고 사랑하면서도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로렌스 알리아씨가 찾는 게 뭐죠?
제가 찾는 건 사람인데요. 저와 같은 언어를 쓰고 말하는 사람이요. 
그리고 버림받은 적 없고, 소외되더라도 따지지 않고, 평범하게 사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요.
 
Laurence Any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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