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희 감독의 영화 [3학년 2학기]
무주 산골영화제에 다녀왔다.
단 한 편의 영화를 봤지만, 영화는 너무 좋았고, GV는 유쾌하고도 진지한 시간이었다. 하루를 꽉 채운 느낌이 들었다.
졸업을 앞두고 중소기업 공장에서 현장 실습을 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직업계고 학생들의 이야기다.
무시와 냉대, 위험한 작업 환경, 고된 노동, 부당함과 비극적 사건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묵묵히 견뎌내는 창우의 모습은 마음을 아프게 했다.
p. 113 만족스러운 삶, 행복한 일상, 완벽한 하루, 그런 것들을 욕심내어 본 적은 없었다. 만족과 행복, 완벽함과 충만함 같은 것들은 언제나 눈을 깜빡이는 것처럼 짧은 순간 속에만 머무는 것이었고, 지나고 나면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것에 불과했다. 삶의 대부분은 만족과 행복 같은 단어와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쌓여 비로소 삶이라고 할 만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고 그는 믿었다._[9번의 일]
김혜진 작가의 소설 [9번의 일]
작년에 읽다가 끝을 내지 못했던 김혜진 작가의 소설은 무주 영화제를 다녀와서 바로 꺼내 들었다.
통신회사 현장팀에서 26년간 묵묵히 일해온 한 노동자가 있다.
어느 날, 그는 처음으로 저성과자로 분류되고, 재교육 대상자가 된다. 두 번의 교육을 받았고, 이어서 회사로부터 권고사직 제안을 받지만 그는 거절한다.
오랜 세월 일하며 쌓아온 업무 경험, 회사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그 모든 것이 그를 괴롭혔다. 세 번째 재교육에 참여하기로 결심한 이후, 회사는 그에게 전혀 무관한 업무를 맡기고, 먼 지역으로 전보 조치하며, 하청업체로의 전환 같은 방식으로 끊임없이 압박을 가한다.
9번의 일. 소설이 끝날 때까지 그의 이름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가 숫자로 부여받는 소속과 이름, 78 구역 1조 9번. 감옥 속 죄수처럼, 이름 대신 숫자로 불리는 존재로 살아간다.
p. 175 감정이라고 할 만한 건 느껴지지 않았다. 고요히 차오르고 일렁거리며 자신에게로 혹은 타인에게로 흐르던 마음의 움직임 같은 것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그만두었다._[9번의 일]
결국 그는, 점점 인간성을 잃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한 사람의 노동자가 어떻게 존엄을 잃고, 감정을 잃고, 삶의 온기를 잃게 되는지를 따라가며,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이란희 감독의 영화 [3학년 2학기]
정리해고 5년 차, 천막농성 1882일째를 버텨낸 노동조합은 결국 정리해고 무효 소송에서 최종 패소한다.
그리고 주인공 재복은 열흘간의 휴가를 떠난다. 집으로 돌아온 그가 마주한 것은 5년간 돌보지 못한 두 딸의 불만, 엉망이 된 집안, 그리고 가난이다. 수시에 합격한 딸의 예치금조차 마련할 수 없고, 중학교 2학년인 작은딸에게는 오리털 패딩 하나 사줄 여유도 없다. 이제는 정신 차려야 하지 않을까? 5년간 이어온 싸움도 결국 패배로 끝났는데.
p. 154 이렇게까지 하면서 자신이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게 무엇인지, 이런 식으로 무엇을 얼마나 지켜내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이 모든 상황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니고 그가 스스로 선택하고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었다. _[9번의 일]
그는 예치금을 마련하기 위해 친구의 목공소에서 잠시 일하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청년 노동자들. 안전은 보장되지 않고, 당연한 권리조차 요구하지 못하며,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그들을 바라보는 재복의 마음은 무겁게 내려앉는다.
휴가가 끝난 뒤, 그를 다시 천막으로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이 싸움이 더 이상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느낀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 부당한 현실은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고, 결국 두 딸 역시 피할 수 없는 길이라는 생각이 그를 멈추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다시 싸움을 시작한다.
[휴가]의 주인공 재복이 마주한 현실은 어쩌면 [3학년 2학기]의 창우가 맞이하게 될 먼 미래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9번의 가까운 미래일 수도 있다.
서로 다른 시간과 배경을 지닌 세 작품은, 청년기에서 중년기로 이어지는 노동자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얼마나 외로운지를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그려낸다.
세 인물은 각자의 시대에 처한 인물들이지만, 그들이 마주한 현실은 다르지 않다. 이름은 다르지만 하나의 연대기처럼 이어지는 이 이야기들은, 결국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p. 168 그러니까 그가 회사에 기대한 건 마땅히 자신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들이었다. 존중과 이해, 감사와 예의 같은 거창해 보이지만 실은 너무나 당연한 것들을 바란 것뿐이었다. _[9번의 일]
[3학년 2학기] 영화를 본 후, 젊은 배우들과 이란희 감독님의 GV를 함께했다. 감독님의 마지막 말은 나에게 큰 감동과 울림을 주었다. 정확한 워딩이 기억나지 않아 감독님의 연출의도 참고자료를 찾아보았다.
“부모를 잘 만나지 못해도, 타고난 재능을 찾지 못해도, 꿈이 없어도, 엄청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빛나는 성취를 이루지 못해도, 운이 좋지 못해도, 성실하게 노동하며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구나 인간으로서 평등한 권리를 인정받으며 살 수 있다면 좋겠다.”
p. 122 그러니까 종규의 삶에도 타인이 결코 짐작할 수 없는 성취와 감동, 만족과 기쁨, 즐거움과 고마움의 순간들이 있을 거였다. _[9번의 일]
무슨 일이든, 일하며 돈을 벌고, 생활을 꾸려나가는 모든 사람들은 고귀하다.
배경과 운이 좀 더 윤택한 생활을 줄 수는 있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존중받고 인정받아야 한다.
그런 세상이 오기를. 정말,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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